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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연극의 시간은 로마로 향했다

박물관 같은 무대에 올려진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비극 코리올레이너스

by 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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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사우스뱅크에 위치한 내셔널시어터의 사명은 연극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창의성, 전문성, 영향력으로 전 세계 관객들에게 즐거움과 영감을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내셔널시어터는 세 개의 극장(올리비에(1,150석)·리틀턴(890석)·도르프만(450석))을 갖춘 최고의 시설에서 다양한 공연을 선보인다.

내셔널시어터가 지역 극장과 협력해 제작한 작품은 웨스트엔드를 비롯한 각 지역의 극장과 영화관, 온라인에서도 관람할 수 있다. 내셔널시어터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지속적인 투자와 헌신을 통해 언제, 어디서, 누구든지 세계적 수준의 연극을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런 내셔널시어터에서 또 하나의 대작이 탄생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코리올레이너스’(연출 린지 터너)가 9월 24일부터 내셔널시어터 올리비에 극장에서 공연 중이다(필자는 9월 10일부터 대중에게 공개된 프리뷰 기간에 관람했다).


비극을 다룬 두 예술가의 시각적 언어

무대 위, 상체를 드러낸 남자가 양손으로 가죽끈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한눈에 봐도 강인해 보이는 이 인물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다. 그는 기원전 5세기경 고대 로마의 장군으로, 볼스키족의 도시 코리올리를 정복한 공로를 인정받아 ‘코리올레이너스(코리올리의 정복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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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로마 공화정 초기, 도시 정복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코리올레이너스는 집정관으로 선출되기 위해 상처를 공개하고 지지를 호소하는 의식에 참여하지만, 대중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민중의 지지를 잃고 도시에서 추방된다. 평민을 대표하는 호민관들이 그를 반역자로 몰아세우며 제거하려 들자, 코리올레이너스는 원수 아우피디우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 공격을 계획한다. 로마 함락 직전, 코리올레이너스는 가족의 간청에 못 이겨 군대를 돌리고, 아우피디우스의 동맹자들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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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시어터는 13명의 이사회 회원과 이사 겸 공동 최고경영자, 전무이사 겸 공동 최고경영자, 부예술감독, 그리고 15명의 협력 예술가로 구성된다. 협력 예술가는 극장장이 임명하는 직책으로, 예술적 사명의 실현을 위해 극장의 창작 및 제작 활동을 지원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관점을 제시하며,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작품을 제작한다.

내셔널시어터의 협력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린지 터너는 이번 작품을 비롯해 아서 밀러(1915~ 005)의 ‘시련’, 로알드 달(1916~1990)의 ‘마녀들’ 등을 연출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2014년에는 올리비에 어워즈에서 루시 커크우드(1984~)의 ‘차이메리카(Chimerica)’로 연출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같은 해 ‘차이메리카’로 최우수 무대 디자인상을 받은 에스 데블린(1971~)은 터너와 다수의 작품에서 협업한 세트 디자이너다. 그는 ‘햄릿’(2015, 바비칸 센터), ‘시련’(2022, 내셔널시어터) 등에서 터너와 함께 작업했다. 이번 프로덕션의 무대 디자인을 맡은 데블린은 패션과 음악계에서도 활동하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로, 샤넬 No.5 100주년 기념 설치 작품을 비롯해 생로랑, 루이비통 등 유명 브랜드의 런웨이 디자인뿐 아니라 팝 가수 카니예 웨스트, 비욘세, 아델 등의 콘서트 무대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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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와 현대를 넘나들다

‘코리올레이너스’의 무대는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공간을 선보이며 작품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강조했다. 무대 위에는 다섯 줄에 매달린 각기 다른 폭의 기둥들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공간을 변화시켰다. 이 기둥들은 조명에 따라 고급스러운 공간부터 전쟁터의 사령실, 광장으로 변신하며 극의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무대 위 주요 소품 중 하나는 ‘카피톨리노의 암늑대(Lupa Capitolina)’ 조각이었다.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에 전시된 실제 유물을 본떠 만든 이 조각은 로마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암늑대의 젖을 먹는 장면을 표현한 작품이다. 조각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가 ‘코리올레이너스’라는 칭호를 받는 장면에서 두드러졌으며, 로마 제국의 기원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무대에는 흉상, 칼과 방패 등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소품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전쟁터로 변모한 무대에서 전리품처럼 보이며 공간의 다층적 의미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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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민관 시키니우스와 브루투스는 광장이 아닌 고급 양복점에서 등장했다. 작품은 코리올레이너스가 적과 함께 공격해 올 상황을 전혀 모른 채, 한가로이 양복을 맞추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현대적이고 풍자적인 해석을 보여 주었다. ‘코리올레이너스’는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디지털카메라와 현대적인 의상 및 소품들로 시대 배경을 모호하게 표현했다. 이러한 모호함은 극이 특정 시대나 국가에 국한되지 않도록 하여 관객에게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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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재은(영국 통신원) 사진 내셔널시어터


* 월간 객석 2024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프리뷰를 보고 원고를 썼는데, 공연 사진이 공개되지 않아 아쉽게도 극장 사진과 포스터 이미지, 연출가, 무대디자이너의 사진으로 편집됐다. 후에 공개된 사진을 보니 무대 디자인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 어두운 사진들이어서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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