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시브 무비 뮤지컬 그리스 Grease
공연에 가기 전부터 이미 몰입은 시작됐다. 라이델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Principal McGee)의 서명이 들어간 메일에는 핑크 새틴 재킷, 청바지, 캣아이 선글라스, 목이나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 스니커즈까지 세세한 드레스 코드가 일러스트와 함께 안내되어 있었다. “오늘은 당신도 Rydell High의 학생이 돼라”는 초대장 같은 정성스러운 준비 덕분에 공연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기대감은 이미 고조됐다.
최근 몰입형 공연은 ‘슬립 노 모어’나 ‘스토어하우스’처럼 무겁고 진지한 주제로 관객의 감각을 파고드는 방식이 많았다. 서늘하고 긴장감 넘치는 서사에 몰입하며 인간 내면이나 사회 문제를 곱씹게 만드는 공연들이었다. 그런데 런던 배터시 파크에서 만난 이머시브 뮤지컬 그리스(Grease: The Immersive Movie Musical)는 완전히 달랐다. 진지함 대신 재미와 흥미, 그리고 온갖 즐길거리와 놀거리로 무장한 공연이었다. 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웃음과 노래가 터져 나왔고,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었다.
1978년 영화 그리스는 1950년대 미국 하이틴 문화를 담아낸 전설적인 뮤지컬 영화다. 존 트라볼타가 연기한 '대니'는 가죽 재킷과 청바지, 그리고 옆머리를 포마드로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로 상징되는 캐릭터다. 그는 터프하면서도 '샌디' 앞에서는 서툰 소년의 모습을 보이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샌디 역의 올리비아 뉴턴 존은 청순한 여름 소녀로 시작해 마지막에 블랙 레깅스와 재킷으로 변신하는 장면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았다.
그날 공연장에도 샌디처럼 하얀 블라우스에 풀스커트나 블랙 레깅스에 어깨가 드러나는 검은 탑을 입은 관객들이 많았다. 이들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핑크 레이디'라고 쓰인 재킷을 맞춰 입고 나타난 중년 여성들이었다. 한껏 자유로운 기운을 풍기며 호탕하게 웃어 젖히는 소리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뚱뚱하거나 말랐거나, 키가 작거나 크거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화려한 리본을 달고, 등을 훤히 드러내는 옷을 입고, 빨간색 하이힐을 신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관객들. 단단히 준비해서 제대로 즐기러 온 관객들은 영화와 무대, 음악과 분위기를 흠뻑 즐겼다.
런던의 겨울은 하이드파크에서 열리는 윈터 원더랜드를 빼놓을 수 없다. 너른 풀밭이었던 공원이 에버랜드로 변신하는 겨울의 짧은 낭만이다. 이머시브 그리스는 마치 서머 원더랜드 같은 느낌이었다.
놀이 기구와 오락거리, 먹거리를 파는 야외 공간에서 놀다 보니 스크린에 메인홀로 이동하라는 안내가 떴다. 무대와 스크린이 겹쳐지며 장면이 이어지는 동안, 배우들은 관객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다. 나는 아이 둘과 함께 메인홀로 들어갔다. 어깨에 매대를 멘 직원에게 팝콘을 하나 사서 앉을 곳을 찾았다. 입구 쪽 객석은 이미 가득 찼고 무대가 잘 보이는 멋진 객석은 VIP를 위한 좌석이었다. 아이는 그곳에 앉고 싶어 했지만 나는 일반 좌석 티켓을 구입했기에 무대를 끼고 빙 돌아 빈자리를 찾았다.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화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대니'역 배우가 다가오더니 양옆에 앉아 있던 아이들과 주먹 인사를 나눴다.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던 내게 손을 내밀기에 나에게도 주먹 인사를 하려나보다 했는데, 손을 이끌어 잡더니 손등에 키스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몰입 완료. 영화 속 대니가 직접 눈앞에 나타난 듯 영화 '그리스' 속으로 빠져들었다.
관객들은 배우들을 코앞에서 바라볼 수 있고, 때로는 무대에서 같이 춤을 추거나 게임을 할 수도 있었다. 관객 누구나 주인공과 연결될 수 있는 이런 연출은, 전통적인 공연장이 주는 경계선을 완전히 허물었다. 영화와 현실이 겹쳐지고, 스크린과 무대가 오버랩되는 구조 속에서, 나는 분명 관객이었지만 동시에 극 속 인물이기도 했다.
현장은 음식과 음료도 영화 속 세트를 재현했다. 핫도그, 버거, 프렌치프라이, 아이스크림 선데이, 그리고 와인과 칵테일까지. 드라이브인 극장을 재현한 좌석도 있었지만, 사실 어디에 앉든, 혹은 서든 공연을 보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라이브 밴드가 연주하는 곡에 맞춰 모두가 노래하고 춤을 췄고, 스포츠 경기 장면에서는 관객들이 직접 응원에 참여했다.
이머시브 그리스는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배우들과 부딪히고 인사를 나누는 영화 속 삶의 체험이었다. 이 작품은 중년들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부모들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캐릭터 인형극에 아이들을 데려가, 극장에 아이들만 입장시킬 필요가 없다. 어른과 아이,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새로운 놀이터, 부모 세대의 추억을 자녀에게도 직접 체험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몰입형 뮤지컬이었다. 세대와 취향을 초월해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체험형 공연이 우리에게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