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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눈물로 엮는 백만 가지 희망의 목록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 8.1~11.8

by 정재은
026 객석아이 영국_내게 빛나는_25.09월_1.png 월간 객석 2025년 9월호, 객석 아이에 기고한 글을 옮겼습니다


2013년 영국에서 초연한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Every Brilliant Thing)’은 2014년 에든버러 프린지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80여 개국에서 공연됐다. 한국에서는 2018년 두산아트센터(제작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에서 처음 선보였으며, 지금까지도 다양한 공간에서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작품의 명성에 비해 웨스트엔드 진출은 다소 늦었다. 관객과의 소통이 중요한 이 공연은 원형 구조를 갖춘 극장에 적합한데, 2022년 변형 가능한 무대를 갖춘 앳소호플레이스(@sohoplace)가 문을 열면서 비로소 웨스트엔드에 입성했다.


518277134_122130023750863853_7003481980803348374_n.jpg 2025 웨스트엔드 공연 출연진. 레니 헨리, 조니 도나호, 암비카 모드, 수 퍼킨스, 구미니 드라이버 ©Oliver Rosser


모놀로그에서 시작된 특별한 이야기

이 작품은 2005년, 영국의 극작가 던컨 맥밀란(1980~)의 첫 공연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무대에 서야 했던 한 배우를 위해 새롭게 쓴 모놀로그에서 시작됐다. 이후 단편 연극제로 이어졌고, 짧은 기간 공연을 올리며 많은 관객을 울렸다. 맥밀란은 영국 코미디언 조니 도나호(1983~)의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영감을 받아 캐릭터를 확장했고, 2014년 에든버러 프린지 공연 이후 수백 회에 걸쳐 무대에 올랐다. 이번 웨스트엔드 공연에는 성별, 나이, 국적, 성적 지향, 배경이 모두 다른 다섯 명의 배우가 번갈아 출연하며, 작가는 각 배우의 정체성과 경험에 맞춰 대본을 다듬었다.


‘내게 빛나는 모든 것’은 한 명의 배우가 여러 인물을 연기하지만, 중요한 역할은 관객이 맡는다. 수의사, 상담 선생님, 부모, 연인 등 다양한 인물들이 그날의 관객 중에서 지목된다. 배우는 공연 시작

전부터 무대에 나와 관객을 큐레이팅하며, 즉석에서 대사와 흐름을 조율한다. 사소한 소품마저도 관객에게 빌려야 한다. 이러한 즉흥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공연의 핵심이며, 스탠드업 코미디와 즉흥 연기 경험이 풍부한 배우들이 순발력을 발휘해 공연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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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공동 창작자이자 초연 출연자 조니 도나호의 2025년 공연 모습 ©Danny Kaan


이야기의 화자는 자살을 시도한 엄마와 마주한 일곱 살 아이다. 아이는 엄마에게 들려주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빛나는 것들’의 목록을 쓰기 시작한다. ‘1. 아이스크림’에서 시작한 단어와 문장은 백만 개에 이를 때까지 이어지고, 목록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한동안 멈춘다. 그러다 그것이 필요해진 어느 날, 목록은 다시 읽힌다.


이 작품은 고통에 집착하지 않고, 그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린다. 우울증을 다루지만, 코미디 장르로 분류될 만큼 유쾌하고 따뜻하다. 배우뿐 아니라 관객도 서로를 마주 보며 유대감을 느끼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함께 공연을 만들고, 같은 공간에서 감정을 공유하면서 관객과 배우 모두가 위로와 희망을 발견하는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 작품은 내년에 다시 한국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나눈 관객의 웃음과 눈물은 고스란히 기록되고, 매회 새로운 버전과 함께 ‘빛나는 것들’의 목록은 끝없이 확장될 것이다.


글 정재은(영국 통신원) 사진 앳소호플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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