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시 아트 센터 Battersea Arts Centre
무지개 색깔 횡단보도를 건너 배터시 아트 센터 앞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건물을 둘러싼 정원이다. 계절마다 다른 꽃과 풀, 주민들이 가꾼 채소가 어우러진 이 공간은 지역 공동체의 얼굴이다. 정원은 누구나 함께 흙을 만지고 수확을 나누며 이웃을 만나는 장소이자, 2015년 화재 당시 센터를 지켜낸 지역사회의 도움과 성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조성된 공간이다. 배터시 아트센터에서는 예술과 커뮤니티가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정원에서 시작된 교류와 연대는 건물 안으로 이어져, 무대와 프로그램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1893년에 세워진 ‘배터시 타운 홀’은 철도 노동자와 이주민이 몰려든 지역을 위해 문을 열었다. 곧 이곳은 격렬한 토론과 조직의 심장부가 되었고, 1900년 무렵에는 ‘배터시 자치구’의 사회·문화·정치가 요동치는 장으로 기능했다. 배터시 최초의 공영주택 구상과 추진, 여성 참정권 운동의 연설과 논쟁, 런던 자치구 최초의 흑인 시장 선출, 인도 출신 하원의원 당선까지—공적 삶의 전선이 이 홀을 거쳐 지나갔다.
배터시 아트 센터가 남긴 가장 큰 유산 중 하나는 ‘스크래치(Scratch)’라는 창작 방식이다. 2000년 무렵 시작된 스크래치는 미완의 아이디어를 무대 위에 올려 관객과 함께 시험하고 다듬는 과정이다. 예술가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새로운 발상을 검증할 수 있고, 관객은 단순한 관람자가 아니라 창작의 동료가 된다. 이 방식은 곧 BAC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BAC는 작품이 완벽하게 다듬어진 산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주되는 과정임을 보여주었다. 펀치드렁크의 몰입형 공연 〈붉은 죽음의 가면〉처럼 건물의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실험도, 디지털 공간에서 창작자와 관객을 잇는 ScratchR 같은 온라인 플랫폼도 모두 이 사고방식에서 비롯됐다. 불완전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태도가 BAC의 힘이 된 것이다.
이 철학은 2015년의 화재와 그 이후의 재건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3월 13일 금요일, 그랜드 홀에서 시작된 불길은 건물의 심장을 앗아갔다. 그러나 단 하루 만에 BAC는 다시 문을 열었고, 런던 시민과 예술가, 기업이 힘을 합쳐 공연을 이어갔다. 6천 명이 넘는 후원자와 지역사회의 성원 덕분에 BAC는 더 깊은 의미를 가진 장소로 거듭났다.
건축가 하워스 톰킨스는 화재 흔적을 지우는 대신 그을음을 남기고, 잃어버린 천장을 합판 격자 천장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관객은 복원된 홀에 들어설 때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재탄생을 동시에 경험한다. 불완전한 상태를 지우지 않고, 그 흔적을 BAC의 일부로 수용한 것이다.
스크래치와 재건 이야기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닮아 있다. 스크래치는 미완의 순간을 드러내고, 화재는 건물의 상처를 드러냈다. 그러나 BAC는 그 미완과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창조의 에너지로 전환했다. 그래서 BAC는 언제나 불완전함과 흔적을 껴안는 용기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용기야말로 이곳이 앞으로도 ‘비범함의 집(Home for the Extraordinary)’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다.
BAC는 2020년, 세계 최초의 Relaxed Venue를 선언했다. 발달·신경다양성 관객과 예술가가 공연 내내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규범을 바꾸고, 사회적 모델(Social Model of Disability)을 기준으로 제도와 공간을 손봤다. 모든 공연을 ‘릴랙스드’로 설계한다는 원칙은 곧 ‘환대를 시스템으로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가격 장벽을 낮추려는 Pay What You Can 운영도 계속된다. 관객은 형편에 맞게 지불하고, 그 대가로 예술과 지역의 순환이 유지된다.
배터시 아트 센터는 공연장이면서 동시에 젊은 세대와 지역 공동체의 미래를 키워내는 장이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Next Gen Producers이다. 매년 18세에서 29세까지의 청년 8명이 선발되어, 15주 동안 제작·예산·마케팅·아티스트 관리 전반을 배우며 BAC의 대표 행사인 Homegrown Festival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The Agency는 지역 청년이 직접 사회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기획하는 창의적 기업가 정신 프로그램이다. 12주 동안 연구와 기획을 진행한 뒤 전문가 앞에서 발표해 자금을 확보할 기회를 얻는다. 이 과정을 통해 실제로 여러 프로젝트가 지역에 뿌리내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보드게임 〈Life is What U Make It〉이다. 선택과 결과를 주제로 한 이 게임은 지역 청소년 교육 현장에서 실제로 활용되며 성장해 왔다.
눈에 띄는 활동은 BAC Beatbox Academy다. 매주 목요일 저녁, 11세부터 29세까지의 참가자들이 모여 힙합, 그라임, R&B, 덥스텝 등 다양한 장르를 탐구한다. 이곳에서는 초보와 숙련자가 한자리에 모여 목소리와 리듬을 실험하며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 간다. 수요일에는 BAC Dance Academy가 열린다. 전문 강사와 함께하는 힙합·스트리트 댄스 수업으로, 최대 20명 규모의 소규모 수업이라 참가자들이 개별 역량을 다지면서도 팀으로 호흡하는 법을 배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BAC는 Changemakers in Residence 제도를 통해 지역의 젊은 활동가가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실험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제작 자원, 멘토링, 전문 교육을 제공해 청년이 공동체의 변화를 이끄는 주체로 설 수 있도록 돕는다.
BAC의 커뮤니티 가든은 2015년 화재 이후 주민들의 성원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으로, 누구나 와서 식물을 가꾸고 수확하며 이웃과 교류할 수 있다. 정원은 ‘Generosity(관대함)’이라는 가치를 상징하며, 코로나 시기에도 주민들에게 소통의 창구가 되었다. 또한 커뮤니티 파트너스 제도를 통해 지역 단체와 그룹이 아트 센터 공간을 무료로 활용해 창의적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 공연장 바깥으로는 커뮤니티 허브와 가든이 열려 있고, 모두가 드나드는 일상 속 플랫폼으로 확장되고 있다.
Battersea Arts Centre is a Home for the Extraordinary.
배터시 아트 센터는 특별함이 살아 숨 쉬는 집입니다
이 문장에는 배터시 아트 센터가 지난 반세기 동안 해 온 일과 앞으로의 약속이 응축돼 있다. 모든 프로그램은 이들이 추구하는 ‘Home for the Extraordinary’라는 비전을 실천하는 방식이다. 젊은 세대가 창작자로 성장하고, 주민이 예술과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돌보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흐름이 바로 이곳, 배터시 아트 센터에서 만들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