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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 Jul 18. 2023

노트북 어댑터 실종 사건

어댑터도 없고 어이도 없다

런던에 천천히 적응해 가는 사이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미 대학원 수업은 진행되고 있었고 다음 주까지 읽어야 글이 대여섯 편이었다. 아직 영어로 읽고 이해하는 것이 느려 번역기의 도움을 받느라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책상도 없는 에어비앤비 거실에서 열심히 번역기를 사용해 PDF를 번역하고 있었다. 한참 노트북을 쓰다가 충전을 하려는데, 어댑터가 없었다.


캐리어와 배낭을 몽땅 뒤져도 없었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도 고개를 들었다. 옷은 모두 꺼내 숙소 옷장에 정리를 했고 하나 가득 가져온 약상자들 사이에도 없었다. C타입, 5핀 여러 가지 충전 선들 사이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았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기가 막혔다. 나는 공부하러 멀리 여기까지 온 사람이 맞나? 어떻게 가장 중요한 걸 안 가져 올 수가 있지? 뭐 하는 사람이지? 나 자신이 너무 멍청해서 견딜 수가 없었고 엄청난 실망감이 몰려왔다.


여행을 다니면서 크게 실수했던 장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여권을 잃어버렸던 일본 어느 공항, 기차표를 두고 내렸던 스위스 어느 산 꼭대기, (엄마가 잘 간수하라고 했던) 주차티켓을 어디에 뒀는지 몰라 조회하느라 한참을 서 있었던 공항 주차장, 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 뻔해서 옷이 흠뻑 젖도록 뛰었던 어느 겨울 런던 공항...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장면들은 선명했다. 당황스러웠던 기분도 그랬다. 으이그 쯧쯧쯧... 엄마가 나를 한심해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먹구름에 갇혀 있다가 어댑터를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검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당장 나는 어떤 어댑터를 사야 하는지도 몰랐다. 우선 쿠팡에서 비슷한 모습을 가진 어댑터를 검색했다. 팁사이즈 외경 3.0mm, 내경 1.0mm, 팁 길이 9.5mm... 정격출력 인풋 아웃풋 메가헤르츠 암페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쿠팡에는 정품과 호환 어댑터가 있었고 어떤 모델이 노트북에 맞는지도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아마존에 비슷한 것을 찾다가 지치고 말았다. 과연 내 노트북에 맞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한국이었다면 쿠팡으로 주문해서 내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설령 맞지 않아도 빠르게 반품하고 맞는 것을 찾을 텐데. 이런 아쉬움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슬퍼졌다. 남편이 자신의 오래된 맥북을 쓰라고 했지만 나는 내 것이, 익숙한 그것이 필요했다. 


영국에 오면서 짐을 하루 이틀 만에 싼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던 집을 빼서 시어머니 집에 한 달여간 얹혀살며 그 어마어마한 짐 속에서 가져갈 것들을 추렸다. 정말 오랜 기간에 걸쳐서 나누고 버리고 정리했다. 친구들에게 줄 수 있거나 기관에 기증할 수 있거나 당근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신혼 때 마련하여 아이 둘을 키웠던 오렌지색 소파가 하루아침에 쓰레기가 되었을 때 마음이 쓰렸다. 10년 가까이 살았던 수납공간이 많았던 집에서는 엄청난 양의 물건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 오리고 접어 만든 것 등 버리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을 버려야 했다. 


떠나오기 전날 밤에도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짐을 여몄다 풀었다 했다. 새벽까지 항공편으로 부칠 수 있는 가방 무게를 맞춰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겼다. 조금이라도 자려고 누웠다가 부치는 짐에 배터리가 있으면 안 된다는 인터넷 글을 보고 도로 일어났다. 체온계, 탁상시계,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찾아 건전지를 빼느라 다 쌌던 짐을 풀어헤쳤더랬다. 그러면서 노트북 어댑터를 빠뜨렸나? 


목록을 만들어 오래 챙긴 물건들이었다. 노트북과 어댑터는 당연히 1순위였다. 그런데 없다고? 완충을 하려고 마지막까지 콘센트에 꽂아뒀다가 노트북만 들고 왔나? 시차를 맞춰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거실 텔레비전 옆에 남아 있는 충전선이 있는지 여쭤봤지만 없다고 하셨다. 그곳에 없다면, 여기에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다. 두고 온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다시 짐을 홀딱 뒤집었다. 


있었다!! 어느 파우치 안에 꽁꽁 여며져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소중한 것이 깨질세라 단단히 쌌던 것이 그제야 기억났다. 기억력은 나쁘지만 그날 생각했던 것만큼 아주 끔찍하게 형편없고 멍청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지금도 그 어댑터를 연결한 노트북으로 이 글을 쓴다. 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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