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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 Oct 21. 2023

대화를 듣고 적절히 끼어드시오

학부모 모임인지 듣기 평가인지

학교 소식은 classlist라는 앱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학년별, 반별 소식을 공유하기도 하고 부모들끼리 쪽지도 주고받을 수 있는 커뮤니티 앱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3학년 부모 모임이 있다는 소식이 앱에 공지됐다. 일명 Parents Night Out. 학교와 교육 과정에 대한 정보도 얻고 엄마들과 인사도 나눌 겸 참석 의사를 표시했다. 

 

아이들을 위해 가겠다고 했지만 잔뜩 긴장한 채로 학교 근처 카페 겸 펍으로 향했다. 공지 글을 올린 학부모 대표 이름을 대며 그 사람 이름으로 예약한 자리가 어디인지를 물었다. 웨이터가 확인해 보더니 그런 이름은 없다고 했다. 조금 당황했지만 학교 이름을 이야기했더니 창가 쪽 자리를 안내해 줬다. 두 명이 미리 도착해 해피아워 - 1잔을 주문하면 2잔을 주는 – 를 즐기고 있었다. 어느 반 누구 엄마인지, 내 이름은 뭔지 이야기했다. 듣기 평가가 시작됐다. 

 

영국에 오기 전에 IELTS 시험을 준비했었다. 꽤 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했었는데 그래서인지 이곳에 와서도 한동안은 모든 것이 이 시험공부의 연속인 것 같았다. 인터넷 가입이며 각종 안내문을 읽는 것은 Reading 영역 공부로 느껴졌다. 그날 엄마들 모임은 Listening Test, 듣기 평가였다. 거기에 더해 Speaking까지.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적절히 끼어들어 발언하는 것까지가 오늘의 과제였다. 

 

우선 어느 반 누구 엄마인지 파악해야 했다. 나는 그들의 이름과 아이들 이름을 적어볼까 하고 노트와 펜을 가져갔는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의자에 살짝 걸터앉거나 서서 대화를 나눴다. 학부모 어플에 부모 프로필을 보면 어느 반이고 자녀는 몇 학년 누구인지 나오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폰을 들여다보는 분위기도 전혀 아니었다. 오로지 집중해서 기억하고 대화에 참여해야 했다. 

 

문제는 엄마들의 억양이 각양각색인 것이었다. 영국 악센트를 비롯해 프랑스, 이탈리아 등 그들만의 독특한 억양이 있었다. 다양한 억양만큼 생김새도 달랐는데 이야기를 하다가 와 코가 정말 높구나, 눈이 정말 깊네, 속눈썹도 엄청 길구나, 얼굴 골격이 완전히 다르게 생겼구나 감상하기 바빴다. 어떤 엄마와는 이야기를 하다가 공통 화제가 없어 대화가 금방 끊겼다. 서너 명이 대화를 하면 그 대화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다가 나도 한마디 거들려고 끼어들 타이밍을 보느라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두 시간 넘게 초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고, 띄엄띄엄 나도 대화를(스피킹을) 하다 보니 진이 빠졌다. 사실 중요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수영 수업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올해 3학년은 다른 학년에 비해 운이 없다는 이야기 정도였다. 그래도 얼굴을 마주 보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으니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며 헤어졌다. 

 

다음 날 나는 그 자리에서 만났던 엄마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전 그 엄마가 맞나 싶게 아주 건조하게 인사를 받을 뿐이었다. 어제 분명히 나랑 한참 이야기 했는데, 그 자리에서 뿐인 관계였나. 그 뒤로 나도 인사를 하지 않고 지냈다. 내 딴에는 엄청나게 에너지를 소모한 일이었는데 좀 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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