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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 Oct 22. 2023

부대찌개를 끓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우당탕탕 런던 일상

어리석게도, 한식 없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런던에 올 때 반찬이나 장류, 참기름 같은 것을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나마 무게가 가벼운 조미김만 잔뜩 들고 왔었다. 그런데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날씨가 추워지니 으슬으슬 몸이 시리고 뭘 먹어도 계속 허기가 졌다. 밖에서 사 먹을 수 있는 따뜻한 것이라곤 커피뿐이었다. 뚝배기에 나오는 뜨끈한 설렁탕이나 곰탕에 파를 잔뜩 넣고 그 국물에 쌀밥을 적셔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에어비앤비에서는 짐을 늘릴 수 없었기에 빨리 소진할 수 있는 식재료를 사서 음식을 해 먹었다. 보름을 지내고 집으로 들어간 후 워털루 역에 있는 한국 마트에 가서 우선 된장, 액젓, 미역을 샀다. 마침 15퍼센트나 할인 중인 된장이 딱 하나 남아 있어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브랜드는 상관없었다. 어느 포장에 담겼든 그것은 내가 아는 익숙한 맛, 된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방이 무거운 것도 아무 상관없었다. 옥상에 있는 커다란 장독에서 어머님이 담아놓으신 된장이며 고추장을 퍼다 먹다가, 시판 된장이 할인하는 것에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여기가 아니면 몰랐을 기쁨이었다.


한동안은 김치를 구경도 못했는데, 감사하게도 아이 친구 부모님께서 김치 한 포기를 가져다주셨다. 밀폐용기 뚜껑을 열자마자 맛깔스러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예쁘게 자를 사이도 없이 손으로 이파리를 쭉 찢어 입에 넣었다. 입 안에서 매콤 새콤 달콤한 맛에 밥 생각이 절로 났다. 글을 쓰는 지금도 군침이 돈다. 덜 익으면 덜 익은 대로, 익으면 익은 대로 맛있는 김치를 오랫동안 두고 먹었다. 어느 날은 잘라진 돼지고기가 보여서 이걸로 김치찌개를 끓이면 딱 좋겠다 싶어 장바구니에 넣어 왔다.

 

김치를 자르고 육수를 준비해 놓고 달군 냄비에 고기를 먼저 볶으려고 했다. 포장을 뜯는데, 이런. 베이컨 훈제 냄새가 훅 올라왔다. 뜯긴 포장을 보니 SMOKED BACON이라고 쓰여있다. 왜 나는 포장지를 읽지도 않고 고기 색깔과 모양만 보고 샀을까. 그래도 물을 넉넉히 붓고 끓이면 괜찮겠지 하며 김치와 양파를 넣고 육수를 부어서 끓였다. 그러나 그것은 고기 모양을 한 베이컨일 뿐이었다. 너무 짜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냉장고 있는 갖은 야채를 넣고 물도 한 주전자를 넣고 계속 끓였다. 한 끼 먹을 양의 김치찌개를 끓이려다 부대찌개를 한 솥 끓였다. 베이컨 찌개를 여러 날에 걸쳐 먹었다. 


고기만 보고 돼지고기려니 했는데 베이컨


런던에는 반려견을 키우는 이들이 많다. 산책을 시키는 이들은 공원에 도착하면 목줄을 풀어준다. 강아지와 개들은 신나게 너른 풀밭을 달린다. 우리 아이들은 강아지를 좋아하지만 집에서 키워본 적이 없고 주변에 키우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은 가족 모두 공원에 갔는데 귀여운 강아지, 그렇지만 덩치가 꽤 큰 강아지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둘째는 큰 강아지가 가까이 다가오자 달리기 시작했다. 강아지는 신이 나서 아이를 쫓아갔다. 주인이 계속 강아지를 불렀지만 강아지는 둘째만 쫓아 달렸다. 아이와 강아지는 뱅글뱅글 광활한 공원을 한참이나 뛰었다. 나는 아이와 꽤 떨어져 있었고 아이가 재미있어 장난을 치고 있는 줄 알았다.  


나에게 다가온 아이는 울고 있었다. 주인이 뒤늦게 강아지를 붙잡으며 어려서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울고 있는 놀란 둘째를 달랬다. 다음날 영국인 튜터에게 물어보니 개가 뛰어올 때는 같이 뛰면 안 된다고 했다. 개가 놀자는 것으로 알고 신나서 더 쫓아온다고. 어제 같은 경우에는 가만히 서 있거나 주인에게 가면 된다고 했다. 어쩐지 강아지 주인의 사과가 뭔가 성의 없다고 느꼈는데 아이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나 보다. 어려서부터 개를 접할 기회가 많은 여기 아이들은 큰 개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대부분의 개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이런 일이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에게도 행동 요령을 잘 알려주고, 주말에는 공원에 나가서 주인에게 허락을 구하고 개들을 쓰다듬어보며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집고양이들이 밖에 잘 돌아다닌다


어느 날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이곳에서 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므로 전화가 올 일도 거의 없다. 깜짝 놀라 전화를 받았는데 영어로 뭐라 뭐라 말을 걸어왔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을 다시 말해달라고 했다. 독특한 억양을 쓰는 목소리는 몇 번을 반복해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광고 전화인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다. 나는 메일 주소를 불러줄 테니 안내할 내용을 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런데 메일 주소를 불러주는 것이 큰 산이었다. 내 발음이 시원찮은지, 통화 상태가 좋지 않은 건지 고작 알파벳 여덟 글자를 불러주는데 5분도 넘게 걸렸다. 마운틴의 엠, 애플의 에이, 이런 식으로 아는 단어를 총동원하여 알파벳을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그조차 다르게 알아듣고 엉뚱한 알파벳을 말했다. 한참 실랑이를 하고 있으니 남편이 무슨 전화냐고 물었다. 광고 전화라고 했더니 기막혀하며 얼른 끊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시작한 메일 주소 불러주기를 마쳐야 했다. 몇 분 동안 나머지 몇 글자를 마저 불러주고, 내가 불러줬던 글자들을 그가 다시 읊은 후에야 전화를 끊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메일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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