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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 Oct 26. 2023

세탁기 수리 일지 I

근육남을 찾아서

2023년 8월 30일

여느 날처럼 세탁기부터 돌려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삐비빅. 서늘한 경고음이 울렸다. 남은 시간이 표시되어야 할 자리에 E20이라고 쓰여있다. 시작 버튼을 눌렀더니 돌아가다가 다시 멈췄다. 온라인으로 설명서를 찾아보니 배수가 안 되는 오류였다. 세탁조 안에 이불 커버와 침대 시트가 탁한 물속에 잠겨 있었다. 물이 차 있으니 문도 열리지 않았다. 설명서 그림을 들여다보며 강제 배수를 시도했다.

세탁기 하단에 있는 배수구 레버를 돌려 야트막한 베이킹 쟁반에 물을 받고, 그것이 찰랑찰랑 가득 차면 싱크대에 버렸다. 쟁반에 받을 수 있는 양은 한정적이어서 그것을 수십 번 반복해야 했다. 물은 세탁기 하단, 타일이 깔려 있지 않은 시멘트 바닥으로 흘렀다. 아랫집까지 물이 새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수건과 행주를 동원해 물을 닦아 짜냈다. 선풍기를 틀어 말렸다.


9월 1일

머리카락이나 먼지가 걸려 하수구를 막는 경우가 있다는 검색 결과에 따라 막힌 하수구 뚫는 세제를 사다가 세제투입구에 부었다. 배수 버튼을 눌러 작동시켰더니 세탁조가 돌아가면서 뭉게뭉게 거품을 일으켰다. 물은 빠지지 않았다. 어제 다 빼놨던 물을 다시 받아냈다. 거품물이 없어질 때까지 반복.


9월 2일

하수구 세제가 약한 것 같아 젤 타입 세제를 콸콸 부었다. 어제처럼 배수는 되지 않고 거품만 났다. 또다시 수동 배수...

우리끼리 처리할 수 없겠다고 (그제야) 판단하고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또 영어 듣기 평가와 말하기 시험을 치러야 하는 마음으로 잔뜩 긴장했다. 다행히 왓츠앱으로 채팅 상담을 할 수 있었다. 자동 안내에 따라 이름과 주소, 우편번호, 이메일 주소를 넣고 상담원과 연결됐다. 주문 번호와 영수증을 보내라고 했다. 언제 어디서 샀는지 나에게는 전혀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허무하게 상담을 마쳤다. 


9월 3일 - 4일 

일단 논문을 마무리해야 했다. 굳게 문이 잠긴 세탁기가 마음에 걸렸다. 


9월 5일

무려 15,000자 석사 논문을 제출했다. 홀가분했다. 


9월 6일

부동산에서 집에 점검을 오는 날이었다. 부동산 직원에게 세탁기 구매 정보를 받았다. 2021년에 구입했고 3년의 보증 기간이 있다고 했다. 다시 채팅 상담에 연결해 이름과 주소, 우편번호, 이메일 주소를 넣고 상담원을 기다렸다. 기쁜 마음으로 내가 드디어 주문 번호와 구매일을 알아냈다고 말했다. 드디어 수리를 신청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뭘 도와줄까? 언제부터 이상이 생겼어?
  - 일주일 전부터 배수가 안 됐어요.
매뉴얼에 나온 대로 해봤어?
  - 모든 조치를 해봤지만 작동이 안 되네요.
예를 들자면?
  - 멈춰서 에러 코드가 뜨고 배수가 안 돼요.
너는 매뉴얼에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다고 했지만 그건 모든 게 아니야. 플러그 뽑고 필터 확인해 봤어? 배수펌프는 확인했어?
  - 네 필터를 열어봤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우리는 구매자의 연락이나 승인이 필요해. 이 번호나 왓츠앱으로 연락할 수 있어.


9월 7일-10일

세탁기를 쓰고 있는 사람은 나인데 집주인 승인을 받아야 하다니. 집도 세탁기도 나의 것은 아니다. 서비스센터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서비스센터 측에서 구매자와 연락하고 승인을 받아 진행한다는 줄로 이해했다. 


9월 11일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서 다시 채팅 상담을 했다. 또다시 정보를 입력하고 상담 이후에 연락을 받지 못했으며 구매자와 연락이 되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구매자가 서비스 센터에 직접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상담원에게 내가 영수증을 가지고 있고 주문 번호도 아는데 수리를 신청할 수 없냐고 물었다. 

말했다시피 수리를 하기 전에 반드시 구매자가 승인을 해야 해.

괜히 기다리느라 며칠을 날렸다. 부동산에 메일을 보내 세탁기 구매자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9월 12일

부동산에서 알겠다고 했다. 서비스 센터에서 날짜를 정하는데 필요하니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번호를 적어 답장했다.


9월 13일

나는 집주인이 승인만 해주고 내가 수리 날짜를 잡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수리 날짜가 지정된 메일이 왔다. 달력을 펼쳐보니 하필이면 베를린 출장 기간이었다. 다시 부동산에 메일을 보냈다. 시월 이후로 바꿔달라고 했다. 일정을 바꾸려면 집주인이 서비스 센터에 다시 연락해야 해서 곤란하다는 뜻을 표했다. 이메일 말미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너는 친척이나 친구도 없니?

누구에게라도 부탁을 하라는 뜻이었는데 나에게는 저렇게 들렸다. 아이 친구 한국엄마? 근처에 사는 한국 엄마? 아랫집 할머니? 남편 학원 한국 친구? 시간이라도 정해져 있으면 부탁을 할 텐데 오전 8시에서 오후 4시 사이에 언제 올지 알 수 없어 더 난감했다. 평일인데 하루종일 빈집에서 수리기사를 기다려달라고 누구에게 부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빨리 고쳐야 하는데 그날은 안되고 부동산에서는 집주인에게 다시 연락하기 곤란해해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부탁할 사람 하나도 없다. 영어를 잘했으면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설명하고 금방 처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상황에 답답증이 일었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9월 14일 

잔머리를 굴려서 집주인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넣어 채팅상담을 시도했다.  

안녕 제인, (작전 실패다) 이전 상담사가 말했듯이 계정 소유자가 연락해야 해.
 - 저는 그저 수리 날짜만 바꾸고 싶어요. 이건 구매자가 승인한 내용이에요.
계정 소유자로부터 이 요청에 대한 승인이나 연락을 받지 못했으므로 문의는 계정 소유자에게 해야 해.
  - 집주인에게 다시 전화하기가 곤란해요. 날짜만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일렉트로룩스에 수리 예약을 했어?
  - 아니요. RSL이라는 회사입니다. 
오 그래? 계정 소유자가 우리 회사에 수리 예약을 한 것이 아니네. 계정 소유자가 우리 전화번호로 연락해야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

상담 중에 수리센터로 직접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서비스센터에서 집주인에게 보낸 메일을 부동산에서 나에게 전달해 준 것이 기억났다. 그러나 메일 주소는 noreply. 자동 발송되는 메일이었다. 거기에 적힌 웹사이트 주소로 들어가 봤다. 영어로 전화통화를 하는 건 곤욕스럽지만 당장 전화를 걸 수 있을 만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반갑게도 메일 주소가 있었다. 내가 받은 메일을 첨부해서 수리 날짜를 10월 2일 이후로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고맙게도 매우 짧은, 그러나 가능하다는 메일이 왔다. 

좋은 오후,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10월 3일이 어떠신지요?
  - 정말 좋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꼬박 이틀 동안 고민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9월 15일 

바뀐 수리 날짜를 확인하라며 집주인에게 온 메일을 부동산에서 나에게 전달해 줬다. 10월 3일로 정해졌다.

 

9월 21일 - 30일

베를린에 다녀왔다.


10월 3일 

바뀐 수리 날짜에 드디어 세탁기를 고치러 오셨다. 공구 가방과 부품이 들어 있는 듯한 상자, 일정을 관리하는 태블릿을 들고 우리 집 계단을 올라오셨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아저씨는 쾌활하게 뭐가 문제냐고 물었다. 배수가 안된다고 설명드렸다. 아저씨는 익숙하게 세탁기 전원을 켜서 탈수를 하며 유심히 소리를 들었다.

아저씨는 세탁기를 앞부분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남편과 내가 당겼을 땐 꿈쩍도 하지 않던 세탁기가 앞으로 조금 움직였다. 그래서 세탁기 아래 무언가를 받치고 세탁기를 높인 상태에서 물을 빼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했던 것처럼 세탁기 하단 배수구를 열어 물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전문가도 호스나 펌프 같은 특별한 장비를 쓰는 것은 아니었다. 물을 빼내고 나서 아저씨는 세탁기를 작동시켰다 멈췄다 하며 소리에 집중했다. 결론은 이러했다.

배수 모터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나는 모터를 주문해 놓을게. 너는 세탁기를 앞으로 빼놓고 연락해.
 - 네? 어떻게요?
세탁기 양쪽에 전혀 여유가 없어. 바닥도 시멘트라 당겨지지가 않아.
 - 저, 전문가인 당신도 뺄 수 없는데, 그렇다면 누가 뺄 수 있는 건가요?
음, 머쓸맨?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수리기사님은 해맑게 근육남이 뺄 수 있을 거라고 대답하고 떠났다. 나는 어디서 근육남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우습지만 난 하루 만에 세탁기가 고쳐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또 양쪽 어깨에 빨랫감을 가득 메고 빨래방에 다녀왔다. 


10월 4일

부동산에 메일을 보냈다. 차마 '근육남'이 필요하다고는 쓰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아시다시피 어제 세탁기 수리 전문가가 방문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세탁기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 세탁기를 앞으로 당길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전문가는 양쪽에 공간이 전혀 없어서 세탁기가 멈췄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세탁기를 초기에 어떻게 설치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그는 세탁기를 빼내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세탁기가 끼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바닥이 시멘트여서 더 어렵다고 하셨어요.
세탁기를 앞으로 옮기고 다시 부르라고 하셨어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행운을 빌며. 제인


10월 5일

부동산에서 답장이 왔다.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기에 바로 사진을 찍어서 첨부파일로 붙여 답장을 했다.


10월 11일

감감무소식이다. 다시 한번 영국식으로 이메일을 썼다. 

안녕하세요, 이 편지가 당신께 잘 도착하길 바랍니다. 지난번에 보낸 사진은 받으셨나요? 이 세탁기를 앞쪽으로 옮겨줄 수 있으신가요? 아시다시피 두 자녀를 둔 4인 가족은 세탁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행운을 빌며. 제인

그제야 답이 왔다. ‘계약자’가 내일 방문할 거라고 했다. 부동산과 계약하여 집을 관리해 주는 사람인 모양이다. 시간이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 다른 무엇보다 세탁기 고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내일 시간을 비우겠다고 대답했다.


10월 12일 

근육남이 왔다! 부동산에서 말한 계약자가 왔다. 문을 열자마자 이 사람은 세탁기를 당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갔다.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묶고, 테가 두꺼운 검정 선글라스를 머리를 얹은 젊은 청년이었다. 

세탁기를 앞으로 빼주기만 하면 된다고?

그런데 세탁기는 어디엔가 걸린 듯 믿음직한 근육남의 힘으로도 나오지를 않았다. 위로 올려도 양쪽으로 흔들어도 좀체 나오지를 않았다. 청년의 굵은 땀방울이 세탁기 위로 뚝뚝 떨어졌다. 한참 실랑이 끝에 연결된 호스가 팽팽해져 더 이상 뺄 수 없을 만큼 끌어냈다. 나는 엔지니어가 뒷면을 고칠 수 있도록 방향을 약간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몇 분 만에 땀으로 범벅이 되어 나갔다. 그가 가자마자 책상에 앉아 세탁기 수리 서비스센터에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지난 화요일에 엔지니어가 다녀갔는데 세탁기를 이동하고 다시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가능시간: 토요일 하루종일 / 월요일 1시 이후 / 화요일 하루종일 / 수요일 하루종일 / 목요일 3시 이전 / 금요일 하루종일

시간을 조율하느라 메일을 주고받는 시간이 아까워서 나의 일정을 자세히 적어서 보냈다. 꽤나 빨리 답장이 왔다. 그런데 내가 적어놓은 가능 시간이 무색하게 다음 주 토요일에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계약자가 오기 전에 서비스를 미리 신청해 두었어야 하는 건데.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세탁기를 어정쩡하게 개수대 앞 쪽에 빼놓은 채로 두 번째 수리를 기다려야 했다. 근육남이 앞으로 빼놓은, 애매한 각도 그대로 열흘을 지냈다. 싱크대 앞쪽 공간이 좁아 남편은 개수대 쪽으로 갈 수 없었다. 열흘동안 매끼 설거지를 내가 해야 했다. 


고장 난 세탁기를 비뚜름히 놓고 열흘을 지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 두 편으로 나누었어요.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그림 출처 https://www.manualslib.com/manual/2039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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