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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 Oct 27. 2023

세탁기 수리 일지 II

50일간의 대장정

10월 21일

당신의 수리 일정은 ‘하루 종일’로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언제든 가능함을 보장해야 합니다.

이렇게 막연한 약속이라니. 세탁기로 싱크대 앞을 막아놓고 열흘을 기다렸다. 약속 당일은 종일 슬롯이라 수리기사님이 언제 올지 모르는 채로 또 기다렸다. 저번에는 아침 일찍 오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오전 중에 오시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주방을 정리하고도 한참이 지났다. 오후 3시경 두 번째 수리기사님이 문을 두드리셨다. 그런데 하필 나는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세탁기가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들어가시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문 앞에서 양해를 구하지 않았더니 신발을 신고 저벅저벅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통화를 이어갔다.


첫째가 나에게 볼멘소리로 ‘아저씨가 엄마 부르잖아’라며 큰소리로 말했다. 통화하던 분께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끊었다. 주방으로 갔더니 수리기사님은 상기된 얼굴로 말씀하셨다.


나는 고칠 수 없어


맥이 풀렸다. 근육남까지 불러서 빼놓았는데, 이러고 열흘을 기다렸는데. 차분히 설명을 했다. 세탁기를 겨우 빼놓았고 호스가 짧아서 이 방향으로 틀어놓았다고. 수리기사님은 기록을 봐서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세탁기를 틀어놓은 방향이 하필이면 잠가야 하는 밸브가 있는 쪽이라고 했다. 급수를 멈추어야 세탁기를 분리해 배수 모터를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저씨는 세탁기를 몇 번 움직여보시더니 갑자기 가방을 들었다.


난 못해

그러더니 가방을 어깨에 메고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화를 낼 기운도 없었고 그저 당황스러웠다. 기사님은 들어와 다시 가방을 내려놓더니 기껏 빼놓은 세탁기를 도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세탁기에 화풀이를 하듯 거세게 밀었다. 거친 시멘트 바닥에 쇠가 긁히며 드드득 요란한 소리를 냈다. 세탁기가 원래 있던 자리로 조금씩 들어갔다. 아저씨는 세탁기 왼편, 배수관이 있는 싱크대 문이 열릴 때까지 세탁기를 밀어붙였다.


세탁기를 원위치 시켰으니 모든 것이 원점이었다. 나도 했고 저번 수리기사분도 했던 강제 배수를 여러 번 반복했다. 아저씨는 수건이랑 통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 분은 조심성이라곤 전혀 없이 그냥 물을 콸콸 쏟아냈다. 나는 수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바닥에 엎드려 흘러내린 물을 연신 닦아냈다.


아저씨는 싱크대 안으로 기어들어가 배수관을 잠갔다. 그리고 세탁기를 다시 빼냈다. 세탁기 뒷면을 해체하고 배수 모터를 갈아 끼우는 데는 고작 몇 분밖에 안 걸렸다. 모든 문제는 싱크대가 너무 좁아서 발생한 것이다.


전동공구로 순식간에 다시 세탁기 뒷면을 조립한 아저씨는 바닥에 거의 눕다시피 하며 신발 신은 발로 세탁기를 들어 올리듯 밀었다. 힘만 쓰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처리하시는 프로였다. 만약 처음에 이 분이 오셨다면 50일간의 대장정은 30일 정도로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수리가 끝났고 세탁기는 제자리를 찾았다.  수리기사님이 짐을 챙겨 나가시면서 말했다.


애들이 있어서 고쳤다

아저씨는 주방에 계속 얼쩡거리고 있었던 둘째를 보고 가버리려던 길을 되돌아와 수리를 하신 것이었나 보다. 아저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가 아는 모든 감사의 단어를 쏟아냈다. 그 정도로 감사했다. 살그머니

대문을 닫고, 둘째를 끌어안고 외쳤다. "드디어 세탁기를 고쳤어!"

또 수리를 못할 뻔한 긴박했던 그날


세탁기를 고친 후에도 정말 될까 하는 마음이 약간 남아있었다. 쌓여있는 빨래를 세 더미로 분류해 첫 번째로 수건과 내의를 넣고 동그란 문을 눌러 닫았다. 경건한 마음으로 세탁기 앞에 쪼그려 앉았다. 세탁기를 켜고 세탁과 건조 코스로 다이얼을 돌렸다. 시작 버튼을 눌렀다. 세탁조가 시계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촥 하며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나? 세제 투입구를 열어 소리를 들어봤다. 물은 안 나오고 세탁조만 천천히 돌아간다. 몇 번 돌아갔을까. 촤아아아. 드디어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빨래가 젖어들어 색깔이 진해지고 세탁조에 물이 차오르는 것을 기쁘게 바라봤다.


그 후로 꼬박 1박 2일 동안 옷을 빨고 말리고 접기를 반복했다. 몰아서 했더니 온종일 빨래만 하는 느낌이었다. 주머니가 있는 두툼한 트레이닝복 등 덜 마른 것은 빨래 건조대에 널었다. 마른 옷부터 개서 각자 자리에 집어넣었다.


빨래가 쌓여있던 거실 한 구석이 비워졌다. 집에서 빨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편한 거였다. 늦더위에 빨래가 가득 담긴 가방 두 개를 양쪽 어깨에 들쳐 매고 빨래방에 가느라 땀 흘리지 않아도 된다. 빨래방 세탁기에 넣을 동전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었다. 빨래방을 찾아다니며 낯선 동네를 여행하는 유목민 같은 기분을 느꼈다.




영국에선 계약 기간이 끝나고 집을 비워줄 때 원래 상태로 복구를 해놓아야 한다. 이사를 나가기 전에 청소도 아주 깨끗이 해놓는다. 안 그러면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한 금액을 제외하고 보증금을 준다고 들었다. 그래서 폭풍 빨래를 마치고 세심하게 단어를 골라 이메일을 썼다.

안녕하세요,
10월 21일, 우리는 마침내 세탁기를 고쳤습니다! 지난번 계약자의 도움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싱크대가 너무 좁아서 세탁기 옆에 공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리는 매우 어려웠고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세탁기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싱크대 장 내부에 여러 긁힌 자국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은 세입자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였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감사합니다.

행운을 빌며, 제인

다음 날 부동산에서 답장이 왔다.

Thanks for letting me know. This is noted.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하겠습니다.

50일간의 세탁기 수리 대장정이 끝났다.

- 런던, 베를린 빨래방 탐방기가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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