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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 Nov 02. 2023

빨래를 기다리다 보니 가을이다

런던과 베를린 빨래방 탐방기

세탁기를 내 손으로 어찌해 볼 수 없음을 인정하고서 구글 지도를 열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빨래방을 찾았다. 커다란 이케아 타포린가방 두 개에 빨래를 담았다. 세탁을 하다가 멈추는 바람에 젖은 채로 며칠이 지난 침대커버와 이불을 넣으니 꽤나 묵직했다. 양 쪽 어깨에 가방 두 개를 나누어 메고 좁은 육교를 건너 기찻길을 넘고 공원을 가로질러 빨래방으로 갔다.


창문에 붙은 사인도 바래진 아주 오래된 빨래방이었다. 바닥의 타일은 갈라져 있었고 세탁기 뚜껑 이음새에도 먼지가 켜켜이 먼지가 앉아 있었다. 나무 의자는 사람들의 손길이 닿은 그대로 닳아 있었다. 한 때는 최신식 설비를 자랑했을 그곳에는 무려 드라이 클리너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 붙어 있었는지 한 몸이 되어버린 스티커에는 고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중간 사이즈 세탁기 세 개, 작은 세탁기 세 개, 통돌이 세탁기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점보가 5파운드. 스몰이 3, 통돌이는 2파운드였다. 중간 사이즈에 축축하고 냄새나는 빨래를 집어넣고 동전을 넣은 다음 시작 버튼을 눌렀다. 세탁기들  끝에는 이곳에서 오래 일한 할아버지를 추모하는 빛바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들여다보니 1936년생 할아버지께서 2013년에 돌아가셨는데 여태 붙어 있는 것이었다. 십 년 동안 관리를 안 한 것인지 오래오래 추억하는 것인지.


벽면에는 어느 잡지에 소개됐던 페이지가 코팅되어 붙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파스텔 톤의 건조기들이 예쁘게 담겨 있었다. 실제 건조기는 열쇠나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쓴 낙서들이 가득했다. 건조기 위로는 ‘세탁이 끝나면 바로 빼주세요’ 같은 안내문들이 역시나 바랜 채 붙어 있었다.


건조기는 4대가 있었는데 나랑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아주 컸다. 세탁기처럼 꽉 닫히는 문이 아니라 적은 힘으로도 쉽게 열리는 동그란 문을 열면 희미하게 가스 냄새가 났다. 기계 하나하나를 가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네 대가 모두 연결되어 있고 뒤편 어딘가에서 온풍을 뿜는 시스템인 듯했다. 아주 커다란 원통이 돌아가며 빨래가 계속 떨어져 내렸다.


건조기에는 20펜스 동전만 넣을 수 있었다. 동전이 모자라 채 다 마르지 않은 빨래를 담아왔더니 더 무거워서 오는 길에 몇 번을 가방을 길에 내려두고 쉬었다. 어느 집 예쁜 고양이가 내 다리에 머리를 비비며 다가왔지만 너무 힘들어서 쓰다듬어 줄 기운이 없었다.


오래된 빨래방 옆에는 미국식 카페가 있었다. 아이들과 우유, 밀크셰이크, 와플을 시켜 먹었다. 특이하게도 테이블이 모니터로 되어 있어 게임을 할 수 있어서 빨래하는 시간이 1시간뿐인 것을 아이들이 안타까워했다.



빨래를 지고 걸어야 하는 길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빨래방을 검색했다. 아이들 학교를 지나 꺾어진 골목에, 지나다니면서도 몰랐던 빨래방 하나가 있었다. 예전에는 세탁소였던 듯한 외관이었다. 창문에는 여전히 와이셔츠 얼마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세탁소의 주인이셨던 것 같은 아저씨가 늘 계셨다. 안쪽으로 연결되는 공간이 있는 모양이었는데 늘 그 안쪽 문에서 나와 조용히 도움을 주셨다.


아저씨는 세탁기 사용 방법을 알려주셨고 지폐를 직접 동전으로 바꿔주시기도 했다. 지폐를 내밀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세탁기 동전 통을 열었다. 아이들은 그 통이 열리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거기에 들어 있는 동전들을 세어 나에게 내밀면 나는 그 동전을 다시 그 통에 넣고 세탁을 시작했다.


아저씨가 상주하는 만큼 훨씬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세탁이 끝나면 세제 통이 마르도록 열어놓고 건조기는 먼지 거름망을 꺼내 비웠다. 그러나 전 빨래방에 비해 거의 2배의 요금이 들었다. 그렇지만 세제를 잊고 온 날엔 액체 세제를 뚜껑 가득 따라 내주시기도 했다.

여기에는 작은 건조기 4대와 아주 큰 건조기 1대가 있었는데 주인아저씨는 빨래가 많은 나에게 주로 큰 건조기를 권했다. 작은 건조기 4대를 합친 것만 한 크기에 나보다 키가 컸다. 구김도 거의 없고 빨리 마르는 느낌이었다. 집에도 한 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빨래를 옮기고 동전을 넣으려는데 아저씨가 분홍색 양말 한 짝을 내밀었다. 다들 그런다면서. 아저씨가 그렇게 지키고 서서 남겨진 빨래를 챙겨주는 데도 불구하고 빨래방 한 구석에는 주인을 잃어버린 빨래들이 쌓여 있었다.


이 빨래방 옆에는 이탈리안이 운영하는 카페였다. 이름은 브리지 카페. 옆에 기차가 지나다니는 굴다리가 있어서 그런가 보았다. 주방에서 호탕하게 웃는 아주머니의 웃음소리가 가게 밖까지 들렸다. 유쾌한 만큼 가게도 활기찼다. 아침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이 식사를 기다리면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은 이웃인 듯 단골인 듯 서로 인사를 나눴다. 인근 건설 현장에서 잠깐 나온듯한 이들도 푸짐한 아침을 든든히 먹고 다시 일하러 갔다. 런던 끝자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 시작되는 투박한 가게에서 나는 여전히 여행 중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토스트, 오믈렛, 샌드위치, 구운 샌드위치 등으로 구성된 조식은 5파운드 정도였다. 빵 두 조각이 나오는 토스트는 3.5파운드, 오믈렛은 5파운드 선이었다. 라테를 주문했더니 커피를 두 스푼 넣고 카운터에 있는 스팀기로 우유를 데워 티스푼을 툭 꽂아주셨다.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다른 이들이 먹는 오믈렛이며 토스트 냄새에 허기가 동했다. 오믈렛이라고 했는데 달걀부침 같은 것에 감자튀김, 콩조림이 나왔다.


바게트 빵에 얇게 저민 토마토와 햄 등을 넣은 샌드위치도 맛있어 보였다. 별 것 없는 간단한 식사들이 정감 있었다. 길가에 나란히 놓인 테이블 세 개에 골고루 햇볕이 들었다. 아저씨는 테이블을 바르게 정리하고 흔들리는 테이블 다리 아래 냅킨을 접어 넣어 고정시키고 있었다. 단골이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베를린 여행은 꽤 긴 편이었고 세탁기가 고장 나 어차피 집에서 세탁을 할 수 없었다. 여행 후반에 머문 호텔 근처에 빨래방을 찾아냈다. 구글 지도 별점이 무려 4.8이었다. 그동안 가본 런던의 빨래방 두 곳과는 다르게 밝고 쾌적한 분위기에 기계들도 새것 같아 보였다.


비닐봉지에 빨랫감을 가득 모아서 양손에 들고 십분 거리 빨래방까지 걸어갔다. 트램 선로를 넘어 상가에서 Waschsalon이라고 쓰인 간판을 발견했다. ‘살롱’이라니 너무 멋지잖아! 세탁기와 건조기 위에는 빨랫감을 넣을 수 있는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가 비치되어 있었다. 건조기 앞에 널찍한 테이블이 있어 사람들이 빨래를 개서 갈 수 있었다.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기다리는 동안 앉아 있을 의자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커피와 음료, 스낵 자판기도 있었다. 최신식 기계에 예쁜 액자들이 걸린 인테리어까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커다란 이불이 건조기 안에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탁기와 건조기도 신식이었지만 자동화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키오스크가 눈에 띄었다. 터치 스크린으로 되어 있는데 언어도 독일어, 영어를 비롯해 4가지 언어로 지원됐다. 영어로 바꾸고 신기한 마음에 사진도 한 장 찍어뒀다.


비어 있는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고 키오스크에서 내가 쓸 세탁기 번호를 눌렀다. 결제를 하려는데 어쩐 일인지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것이다. 구글지도에서 카드결제가 된다는 말만 믿고 현금을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현금을 빌리고 계좌이체를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빨래방 앞에 현금 지급기가 있었지만 닫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른 아침 햇볕을 맞으며 눈은 세탁기 안에 넣어둔 빨래를 지켰다. 한참 후 아이들과 남편이 현금을 가지고 도착했다. 아이들도 신기해하며 키오스크에 현금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드디어 빨래가 되기 시작했다.


건물 코너에 야외 테라스가 있는 식당이 있어 그곳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베를린 동쪽 어딘가 조용한 주거단지 안이었다. 날은 덥지도 춥지도 않았고, 화창했다. 갑자기 혼자만의 시간에서 가족 모두의 시간이 되었지만 여유롭고 좋았다. 남편 출장 일을 마친 뒤라 내게도 여유가 전해졌다. 무엇보다 며칠 동안 아이들과 나만 지냈던 시간이 많았는데 남편이 함께 있다는 것에 마음이 조금은 놓이는 느낌이었달까.





집에서 빨래를 할 때는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다른 일들을 했다. 세탁기가 다 돌아가고 난 후에도 그냥 두었다가 옷을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서 좀 떨어진 빨래방에 가니 오로지 빨래가 다 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은 뜻하지 않은 데이트가 되었고 나들이가 되었고 휴식이 되었다.


어느 날은 책을 읽었고 다른 날엔 글을 썼다. 더운 날엔 아이들과 아이스크림 한 덩이를 올린 와플을 나눠 먹었다. 비가 왔던 어느 날엔 새로 찾아낸 커피숍에서 남편과 커피를 마셨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려던 남편에게 점원이 오늘의 커피를 작은 컵에 따라주며 맛보라고 권했다.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 남편이 퍽 마음에 들어 하며 필터 커피를 주문했다. 내가 찾은 커피집에서 그의 입맛에 맞는 커피를 만나 나도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도 브라우니와 패스츄리를 맛있게 먹었다.  


땀 흘리며 빨래방을 오가는 사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가게에 앉아 빨래가 되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빨래방 앞 의자에 앉아 발갛게 물드는 나뭇잎을 보고 있으면 계속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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