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가 우리에게 던진 화두(話頭)-
어느새 잊혀버린 생존에 대한 위협 그리고 그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 굶주림ㆍ식민지배ㆍ바이러스ㆍ전쟁ㆍ독재 등이 만들어 냈던 불안정한 삶. 이 모든 것을 지나 -몇몇 국가를 제외한- 전 세계가 안정권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전염병이 전 세계를 다시 덮쳤다. 지구 위의 모든 인간들은 패닉에 빠졌고, 점차 많은 국가와 국민들이 심각성을 몸소 느끼며 이 재앙이 하루빨리 지나가기를 염원하고 있다. 심각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껏 유례없는 조치들과 방안들이 시행되고 있고 크게는 세계의 축제부터 작게는 개인의 여행 일정까지 모든 계획들이 속속 뒤로 미뤄지고 있다. 국경을 봉쇄하는 나라들이 늘어가고, 스페인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전쟁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세계급 재난이 지속되면 될수록 나라 경제는 위기에 위기를 맞고 있고,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한 국가 공무원과 의료진 그리고 텅 빈 거리에서 장사를 이어가야 하는 소상공인들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이 점차 지쳐가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는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할 것 같지만, 10명의 사람이 모이면 10개의 각기 다른 생각이 존재하듯, 사람들은 각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그에 맞는 서로 다른 행동들을 하고 있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할 수 있는 통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각 개인 혹은 단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고집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다른 가치관과 생각은 여러 의견들을 만들어 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의견들은 첨예하게 대립하며 서로를 상처 입히고 위태로움 속 분란을 더해가는 중이다. 그 단적인 예가 여기에 있다.
내가 종종 보곤 하는 유럽 거주 한인 커뮤니티에 질문이 하나 올라왔다. 그 질문의 요지는 ‘의료보험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으로 돌아가 코로나에 걸린다면 치료비용 전액을 자비로 해결해야 하나요?’였다. 질문에 대한 답변과 함께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남겼는데, 간추려 보자면 다음과 같다.
• 치료비는 무료이나, 세금으로 지불되는 것이기 때문에 좋아할 수만은 없다.
• 한국이 싫어서 유럽에서 세금 내고 살았으면 유럽에 있어라. 왜 돌아오려고 하느냐? 한국이 심할 때는 안전하다고 좋아했으면서.
• 대한민국 치료 시스템의 문제이지 그걸 이용하는 개인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 생명과 연관되는 문제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어떻게든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면 받아야 한다. 그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일에서 세금을 운운하는 모습이 충격적이다.
• 유럽 내에서 코로나가 심해지는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피해를 끼치는 짓이다. 한국에서 전염병을 퍼트렸던 사이비 종교인들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 유럽이 안전할 땐 좋아하다가 위험해지니 한국으로 돌아가서 혜택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못된 심보는 보기 좋지 않다.
• 국가에서 세금으로 외국인을 무상 치료하는 목적의 본질은 자국민 보호이다. 괜히 퍼주는 것이 아니라 전염병을 막기 위한 당연한 조치일 뿐이다.
• 만약, 세금으로 무상치료를 하는 것이 문제라면 한국 내 세금을 내지 않는 신분 역시 무상 치료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 만약 내가 전염병에 걸려 그로 인해 죽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혜택을 받든 못 받든 고향 땅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있고 싶다.
• 안전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 누구도 그에 대해 비난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국가에서 이동을 금지하고 있는 마당에 위험을 안고 굳이 돌아가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 유럽 내에 있던 사람들은 그냥 유럽 내에 있어 달라.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
위의 서로 다른 가치관과 생각에서 비롯된 여러 의견들 중 어느 것에 공감하는가? 누군가는 어느 한 의견에 100% 동의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 의견에 죽을 때까지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혹은 나처럼 모든 의견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위의 의견들을 읽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위의 한 의견처럼 생각지도 못 한 다른 이의 생각에 놀란 사람도, 상처 입은 사람도, 분노하는 사람도 그리고 나처럼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위의 사례처럼 코로나가 만들어내는 상황 하나하나마다 치열한 의견 충돌이 일어나고 있고, 그 충돌은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에게 혼란을 더해주고 있다. 바로 이 혼란 속에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 코로나 사태가 우리에게 던진 *화두(話頭)가 있다.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할 사회에서 다른 이를 생각해 줄 여유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사회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따로 사는 것보다 모여 사는 것이 살아가는 데 있어 이로운 점이 더 많다는 것에는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그 이점이 많은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는 법 이외에도 규칙과 약속, 윤리와 도덕, 배려와 수용 등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딜레마는 여기에서 나온다.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선 다른 사람을 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전염병이 다른 사람을 생각해 줄 여유를 앗아가 버렸다.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이 위협당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가장 안전해 보이는 방법은 일단 나와 내 가족부터 챙기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한번 상상해보자. 진천ㆍ아산 주민들이 주민 안전을 위해 우한 교민들을 끝까지 거부했다면, 마스크 회사가 자사의 이익을 위해 마스크를 다 수출하거나 쟁여두었다면, 모든 약국들이 업무 강도가 높아질 것을 우려해 공적 마스크 판매하는 것을 거부했다면, 의료진들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 두려워 확진자 치료하는 것을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말이다. 상상하기 싫은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역설적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다른 사람을 위해야 한다고. 그게 결국에는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진천ㆍ아산의 주민들, 공적 마스크 생산 업체, 각 지역의 공적 마스크 판매 약국들, 최전선에서 전염병과 싸우고 있는 의료진들처럼 말이다. 서로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사회 안에서 나와 내 가족 역시 다른 모든 이들에겐 타인이고, 언제든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할 때 그게 곧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것이 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길 바라지도, 상상할 수도 없다. 다만, 진천ㆍ아산에서 우한 교민을 반긴다는 SNS 게시물 하나가 만들어냈던 따뜻한 기적의 물결과 같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하나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선한 번짐의 또 다른 기적을 바라고 상상해 본다.
*화두(話頭):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길이 없는 딜레마나 역설로 가득 차 있는 물음 (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동녘(2014), p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