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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정 Jul 19. 2022

<오비완 케노비> 캐릭터성 도덕회복과 발전적 삶의 착목

[본문 참조](다수 영화의 스포일러가 담긴 글입니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방영 중인 <오비완 케노비>가 7월 6일(수)에 드디어 6화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본 글은 드라마를 포함한 스타워즈 전반적인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 스타워즈 시리즈는 북미에서 가히 종교적 신드롬을 일으킨 미국 문화의 초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미국의 가장 메이저 한 마이너 문화는 2012년 루카스 필름에 귀속된 채로 디즈니에 홀라당 흡수되었다. 좋든 싫든 이 사건은 스타워즈 팬들이 괄목한 스타워즈 콘텐츠의 대격동일 것이다.


이제 스타워즈는 디즈니의 독자 ott 콘텐츠 스트리밍의 주력 콘텐츠 중 하나이다. 이 스트리밍 서비스의 브랜드는 디즈니 플러스. 넷플릭스처럼 직접 콘텐츠 제작에도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었는데, 그중 당연 항간의 화제는 드라마 시리즈인 '오비완 케노비' 이다. 이 6부작 드라마는 사람별로 호불호가 강하지만, 전반적으로 장점이 돋보이는 시나리오와 연출로 생각된다.


오비완 케노비 드라마의 가로 포스터(출처: 디즈니 플러스)

 

1. 장르 영화와 개연성


앞서 들어가기 전에 전제하고 싶은 조건이 있다. '스타워즈' 같은 장르 극에서는 개연성의 조건이 충분히 가변적이고, 모든 요소가 필연적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상의 바탕으로 두고 시작해야 한다. 가령, 스타워즈 세계관 내에서 제다이가 사용하는 주 전투 장비인 광선검으로 적군의 레이저 포탄을 야구공처럼 리드미컬하게 튕겨내는 행태와, 심지어 '케셀런'을 12파섹안에 돌파하는 밀레니엄 팔콘과 한 솔로의 위업 등은 현실과 다르게 극 안에서는 다분히 일반성으로 용인된다.(파섹은 광년처럼 거리 단위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지엽적인 전제와 조건 자체에 유린되지 않도록 좀 우리는 큰 아량의 관점으로 콘텐츠를 다룰 필요성이 있고, 장르영화 내에서 개연성의 부족 따위의 작은 단점 때문에 시나리오와 연출 영역의 큰 장점을 놓지지 않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닌, 반영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고로 스타워즈 팬들이 각박하게 개연성과 정합성을 조목조목 따지기보다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환상스럽고 장중한 세계관과 그에 부합하는 '핍진성'의 개념에 조금 더 오픈마인드였으면 한다.


광선검으로 레이저 탄을 튕겨내는 '루크 스카이워커'(만달로리안 시즌2)

 


2. 캐릭터성과 선택의 기로


(본 글은 <스파이더맨 시리즈>, <아메리칸 뷰티>, <더 배트맨>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 즉 선택(Choice)이라는 유명한 인용구가 있듯이, 인물의 성격과 행로를 나타내기 위해서 선택하는 액션 아이디어를 나열할 것이다. 즉 좋은 시나리오에서는 인물의 액션을 통해 관객이 관찰하고 분석하여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 예를 들어 남자 주인공 A가 여자 주인공 B를 이성으로써 좋아한다는 점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 가장 신속한 방법은 "주인공 A는 여자 주인공 B를 사랑한다"라는 내레이션(보이스 오버)을 삽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이 과연 효율적인 전달법인가라는 의문을 던질 때는 결단코 그렇지 않다. 즉 인물의 액션과 그 행위에 따른 결과(인과성)를 순차대로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인물의 행위 선택은 캐릭터의 입체성을 키워주는 기능을 함유하고 있다. 이렇기에 갈래길에서의 인물의 선택이란 극 중에서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선택의 본질은 선택지의 수량에 있다.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를 하나 싶지만 선택의 분기점에 다다른 인물에게 2 가지 이상의 선택지가 명백히 주어졌을 때 비로소 진정한 선택의 개념이 성립된다. 우리는 그것을 선택의 충분조건이라고 칭한다. 가령,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2>의 악인인 닥터 옥토퍼스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발명품인 인공지능 기계팔의 통제력을 잃게 되면서 선택 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외압과 외부 조건에 의해 이뤄진 악행은 진정한 닥터 옥토퍼스의 선택이라고 볼 수 없고, 그런 측면에서 그를 진정한 악인이라고 칭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대로도 외부적인 강요 또는 마땅한 선택의 부재로 반강제적인 선행을 베푸는 인물은 위선자로 경계되며, 결코 완전한 선인으로 거듭나지 못한다.


<스파이더맨 2>와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서의 선택 가능 여부에 따라 선악의 역할이 다른 '닥터 옥토퍼스'; 필요조건 선택 vs 충분조건 선택


그러나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도덕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취하게 되면 인물은 도덕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더 나은 삶으로 이동하는 포탈에 입성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영화, <아메리칸 뷰티>가 있겠다. 아메리칸 뷰티의 주인공 '레스터 번햄'은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중년 아저씨로 매우 문란하고 방탕해 보이는 딸의 친구 '안젤라'를 보고 한눈에 반해 그녀와의 잠자리를 꿈꾼다. 그 원동력으로 자신의 외양을 가꾸고 목적 달성을 위해 순간순간의 최선을 다하면서도 내심 그 노력의 토대로 일탈을 정당화한다. 결국 극의 절정에는 꿈에 그리던 안젤라와 잠자리를 할 기회가 생기고, 안젤라는 사실 이번 잠자리가 그녀의 본인의 첫 경험임을 고백한다. 그때 레스터 번햄은 현실을 깨닫고 그녀와 잠자리를 하지 않는 도덕적 선택을 하면서 도덕성을 회복한다. 시학에 따르면 이런 인물의 결함과 선택에 의한 도덕성 회복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에 이입하고 응원할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기존의 교착과 답습의 환경에서 주인공이 더 나은 삶으로 인생을 개편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옳바른 선택을 통해 도덕성을 회복하는 주인공

두 번째는 최근 작품인 <더 배트맨>에서도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아메리칸 뷰티>가 주인공의 도덕성 회복에 좀 더 치중한 예시였다면, 이번 작품은 더 나은 삶 또는 발전적인 삶으로의 개편을 완연히 보여주는 예시이다. 영화 <더 배트맨>에서 '브루스 웨인', 즉 배트맨은 초지일관으로 본인을 '복수'로 소개하고 표방한다. 그는 왜 본인을 복수라고 호칭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일까? 부모님이 살해되는 범죄 현장에서 반격하지 못한 유년기 자신의 무력함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트라우마에 연루된 심적 결핍은 자기 파괴적인 답습을 촉발시켰다. 즉, 배트맨은 범죄와 악행이라는 관념적 소재를 실질적 대상처럼 치환하고 대상화한다. 그렇게 어둠이 드리운 고담시의 범죄자 및 악인을 처단함으로써 배트맨은 과거에 대한 복수를 행한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본인과 복수를 동일시하며 등치 하는 것도 같은 원리에서 기인한다.


그러던 배트맨이 결말에 다다라서는 "복수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라는 통찰을 말한다. 복수로부터의 탈피를 선언한 것이다. 이 행위를 통해 악순의 고리를 청산하고 성숙된 더 나은 삶으로 한 발짝 다가선다.


복수에 대한 집착을 거두는 선택을 통해 삶을 개편한 '브루스 웨인', <더 배트맨>


3. 오비완 케노비의 임무와 세 번째 자매의 복수, 그리고 해방


스타워즈 에피소드 3에서 오비완은 공화국이 무너지고 변절한 본인의 제자인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처단하라는 제다이 마스터 요다의 임무를 하달받는다. 오비완 케노비의 제다이로서의 책무는 그의 형제 같은 제자를 손수 제거하는 것이다. 결국 오비완과 아나킨은 무스타파에서 목숨을 걸고 대면하게 된다. 본인의 능력을 과신한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방심한 틈을 타 사지를 절단한 오비완은 듀얼을 종결짓는다. 용암의 열기에 의해 전신이 산화된 아나킨을 보며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한 오비완은 제자의 광선검을 회수하여 복귀한다. 그러나 아나킨은 황제에 의해 구출되고 기계로 개조되어 생명 유지장치 겸 갑옷인 검은 갑주를 두르고 고통스러운 생을 연명하게 된다.


무스타파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아나킨이 펠퍼틴에 의해 구출되는 장면<스타워즈: 에피소드 3>


드라마에 들어서면서 임무를 완수했다고 착오한 오비완은 '아나킨'이' 다스 베이더'로서 살아있다는 말을 세 번째 자매로부터 듣게 되고, 그로부터 요다의 최종 지령은 다시 유효해진다. 그는 제다이로서의 책무를 완수하기 위해 한 행성에서 다스 베이더와 격돌하게 된다. 광선검을 쳐든 양자 간 광란의 검투 끝에 오비완은 승기를 잡으며 그의 생명 유지 장치와 마스크를 손상시킨다. 그 후 얼굴이 반쯤 노출된 그의 옛 제자와 재회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오비완은 그를 아나킨이라고 일관하는 스탠스를 취하고, 반대로 그의 제자는 본인을 다스 베이더라 일축한다.


다스 베이더로 거듭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아나킨의 인격을 모두 말살하여 본인에 의해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이미 제거되었다고 고백한다. 놀랍게도 이 고백을 통해 오비완은 더 이상 제다이로서의 책무가 불효하게 된다. 이 사실을 인정하듯 오비완 또한 말미에는 옛 제자를 더 이상 아나킨이 아닌 '다스'로서 호칭하게 된다.


그 시점부터 오비완은 제다이로서 옛 제자의 형상을 한 다스 베이더를 처단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임무의 구속 안에서 작용에 의한 반사적 선택이 아닌, 주관을 가진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오비완은 그 선택의 엇갈림에서 본질적으로 아나킨에 불과한 다스 베이더를 해하지 않고 유유히 떠나가는 선택을 실행한다. 이로써 오비완은 온전한 자유를 획득하고 도덕적 진취를 향해 정진한다.


옛 제자(아나킨 스카이워커, 다스베이더)와 격돌하는 오비완 케노비<오비완 케노비: 6화>


그다음 시퀀스는 오비완의 관찰과 수호 아래 있던 루크 스카이워커의 목숨을 갈취하기 위한 '세 번째 자매'의 사건을 다루는 추격 장면일 것이다. 세 번째 자매는 '제다이의 대숙청'(오더 66) 때 홀로 살아남은 인퀴지터로 아나킨에게 무력한 영링 시절 살해당한 동료의 복수를 하기 위한 일념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는 앞서 말한 <더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과 흡사한 사연이라 볼 수 있다. 세 번째 자매 또한 소명의 목적에 얽매여 답보 상태에 놓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어김없이 선택의 순간은 오는 법.


복수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힌 '세번째 자매'<오비완 케노비>


그녀에게 어린 루크 스카이워커의 생명을 앗아갈 절호의 기회가 온다. 그럼에도 목전 상황과 과거의 트라우마가 교차되어 그를 끝내 죽이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내적 갈등 끝에 복수의 일념을 포기하고 옳은 선택을 행한 것이다. 그녀는 이 선택을 통해 과거의 구속으로서 벗어나게 된다. 즉 위 선택은 표면적으로는 루크 스카이워커를 위한 이타적인 성격을 갖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파괴적이고 어긋난 목적으로부터 본인을 해방시키는 순간이기도 했다. 세 번째 자매는 선택 이후에 죽임 당한 친구들의 복수를 하지 못했다고 좌절하지만 오비완은 곁에서, 오히려 그 결단을 통해 친구들의 명예를 회복했다고 위안하며, 이제 어떤 사람이 될지는 너 자신에게 달렸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너는 이제 자유다"라고 그녀에게 언지하는데, 이것은 자유에 대한 오비완 본인의 선언이기도 하다.


4. 콰이곤의 등장과 드디어 자유


모든 일이 해결되자 느닺없이 등장하는 '콰이곤 진'


오비완은 극 내내 본인의 스승인 '콰이곤 진'에게 제언을 간청한다. 그러나 그 내내 콰이곤은 그림자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많은 사건이 모두 지나가고 모든 일이 해소가 되어서야 자유의 몸이 된 오비완 앞에 ‘포스의 영’으로 그 형상을 드러낸다. 왜 그동안 콰이곤은 오비완 앞에 등장하지 않은 것일까? 왜냐하면 제다이로서의 책무, 그리고 본인이 해결해야 되는 문제는 비로소 오비완 고유의 문제이며, 결국 오비완 본인이 해결의 단초를 찾을 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콰이곤 진의 등장 또한 콰이곤의 '히피' 이미지와 그의 자유로운 영혼처럼 가뿐하고 털털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와는 별개로 이제 오비완에게도, 세 번째 자매에게도 인생의 행로를 설정할 새로운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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