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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정 Jul 19. 2022

문학 콘텐츠와 NFT

가상화폐와 NFT의 차이


가상화폐와 NFT


NFT와 가상화폐는 블록체인 기술이다. 다만 차이점은 NFT라는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대체 불가성(non-fungible)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NFT는 토큰 별로 고유성을 갖는다. 이 고유성이 내포하는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면, 가상화폐와 NFT는 기술 기반 및 동일한 인터페이스(주로 이더리움 인터페이스)를 사용하지만 화폐는 3가지의 기능에 맞춰져 있다.


첫 번째는 가치 측정의 기능이다. 화폐를 통하여 우리는 재화나 서비스에 대해 가치를 정량화할 수 있다. 위 가치는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정해지고 가격표에 매겨진 숫자는 이에 대한 표시적인 수치이다. 두 번째는 교환의 효용이 있다. 화폐를 통해 상호 간 합의가 이루어지고 교환의 매개체로 활용된다. 교환이 성사되면 사회적으로 인정 가능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세워진다. 단, 거래에 있어서 일회적이거나 지나친 주관의 개입은 이를 오히려 저해한다. 예를 들어, 유치원생 자녀의 그림에 부모가 과히 찬탄하며 100만 원에 구매하는 거래는 일반적으로 타인에 의해 재성사되지 못한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저축의 기능이다. 우리는 화폐를 보관하고 저장함으로써 교환의 수단이 되는 일정 가치를 축적할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간명하게 정리한 가장 대표적인 화폐의 기능이라고 볼 수 있겠다.


가격과 가치; 수요, 공급의 경계선


화폐는 동일한 가치 즉 독자성보다는 통일성을 갖는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지역별 집값이 대체적으로 천편일률적인 상승세를 띄는가 따져볼 때, 수많은 전문가들은 건축의 통일성에 있다고 말한다. 아파트는 구조나 면적, 외양까지 한국사람의 보편적 기호에 의해 규격화되고, 대동소이할수록 화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는 셈이다. 주택의 스펙이 유사한 한국에서는 상호 간의 큰 마찰이나 조정 없이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주거로써의 가치보다 재산으로써의 가치가 더 부각된다. 가상화폐도 마찬가지이다. 일반 화폐처럼 개별적으로 관리되고는 있으나 근본적 가치는 서로 달리하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인 교환이 보편적으로 성립되고 교환 가능한 상태(fungible)를 유지한다. 가상 화폐는 통화 가치로써의 통용이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보는 눈(주관)이 다르다.

 

그렇다면 주관적 판단에 의한 개인마다 천차만별의 가치를 띄는 것은 무엇인가. 대표적으로는 예술품이라고   있다. 보는 사람의 가치 판단에 따라 지갑에서 어느 정도의 단위 꺼낼지에 대한 용의가 달라진다.  예술품은 가치를 품고 있고, 수집(자산) 용도로서 존재하지만 교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토론과 합의를 통해 조정되어야 하고,  거래가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거래별 편차가 매우 크다. , 가치에 대한 통일이 이루어질  없다. NFT 데이터를 블록체인 기술로 토큰화하여  데이터에 고유성을 부여하는 기술이다. 화폐로서의 효용이 아닌 예술품을 디지털 환경에서 예술품을 수집하고 관리할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NFT 가상화폐의 차이점은 비로소  근본적 목적의 차이에서 구별된다.


고유성과 아우라


2022년 5월 말 케이크로 뒤덮인 <모나리자>


5월 말 한 행위 예술가에 의해 모나리자는 케이크에 뭉개지는 수모를 겪을 뻔했다. 그러나 이 만행은 작품을 에두르고 있는 방탄유리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왜 이 사건에 큰 안타까움을 느꼈을까? 그 씁쓸함은 범죄자의 무지로부터 오는 안타까움과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나리자에 대한 박해한다는 무의식에서 발단했을지도 모른다. 앞 문단에서 말했듯이 모나리자는 작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고화질 모니터로 모나리자를 무료로 방구석 1열에서 관람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프린터기로 출력하면 마치 원본처럼 액자로 장식하여 방에 전시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나리자를 소유한다고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가면서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모나리자를 눈으로 품어야 만족할까.


아우라는 원형에서 풍기는 고고한 힘이다. 원본이 주는 고양과 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육감으로 확인해야 하는 영역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원형에 대한 의미 부여, 즉 대상화 단계를 거친다. 원형이 제공하는 고고함과 의미를 어렵게 원본을 만나보기 위해 감내했던 수고스러움과 불편함, 시간과 돈을 쏟아부은 전적을 상기하면서 더 큰 상상의 질료를 덧붙인다. 그렇게 대상에 대한 감상과 평가는 세간으로 퍼져 본래의 영역보다 더 큰 존재로서 거듭난다.


모나리자를 향해 문대진 케이크를 보며 우리는 단순한 작품 훼손의 차원이 아닌 인류의 유산에 위해를 가한, 더 나아가서는 모나리자 그 자체를 학대한 사건으로 기억한다. 모나리자는 전 인류가 공통적으로 애정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등극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끝없이 재생산되면서 원형 고유의 영역을 벗어나 끝없이 확장한다. 그 밑바탕은 원본이 주는 고고함 즉 아우라에 있다. 인류는 콘텐츠가 파생될수록 원본을 동경하고 아우라를 쫓는 경향이 있다.


모나리자의 끝없는 변주, <헤어질 결심> 영화 포스터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이원 시인의 <야후!의 강물의 천 개의 달이 뜬다>의 시집 제목을 인용한다면, 인터넷 시대는 원본과 복제물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특히 문학 콘텐츠와 같은 텍스트 기반의 콘텐츠 같은 경우는 특히 엄정한 통제가 불가능하다. 바탕이 어떻든 Ctrl + C, Crtl + V 하면 달이 강물의 표면을 향해 달빛의 광속으로 가닿아 투사되어 복제되듯이 텍스트는 초단위로 확산된다. 그래서 특히 자판으로 콘텐츠를 생산하는 문학 업계에서는 원본의 개념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저작권(지식 재산권)의 개념과 작품 수집(물리적 소유)의 개념이 충돌할 염려가 높은 영역이다. 고로 텍스트 기반 문화 콘텐츠는 예로부터 아우라의 힘을 과시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출판물은 원본이 있다한들 구분하기 어렵거니와 현실에 존재해도, 책의 형태기 때문에 그림 작품처럼 콘텐츠 전반을 감상하기는 시간적 제약이 있기 마련인데, 그 연유는 텍스트는 2차원 배열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는 길고 긴 결합체이기에 그렇다.


스타워즈의 초기 각본(2차원 배열인 텍스트 콘텐츠는 전반적 감상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NFT의 힘을 얻어보는 것은 어떨까? 무엇보다도 NFT는 텍스트 기반 콘텐츠에 어울리는 단짝이라고 생각된다. 디지털 가상 세계에서의 원형도 아우라를 갖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비로소 문학 콘텐츠도 메타버스에서 전시를 하게 된다면 원형을 배치할 수 있는 날도 자연스레 도래할 것이다. 특히 위에서 예시를 든 각본뿐 아니라, 시 내지는 소설까지도 원형으로서 인정되고 수집의 대상으로 전환됨으로써 콘텐츠가 재발견되고 관리될 수 있는 현상이 생길 것이라 본다. 특히 시 같은 경우에는 사람마다 '인생 시'가 있으며, 시 한 편이 비교적 단편적이기 때문에 수집가로서 모으기에도 무리 없다. 더 나아가 구매자의 NFT 지갑 안에 있는 수집 시를 모아 커스텀으로 시집을 만들고 실제로 도서 형태로 엮어 소유자의 자택으로 선물해주면 어떨까? 문학 콘텐츠도 수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본문의 종지부를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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