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그런 시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 훌륭한 대사는 명료하면서 저속하지 않다. 일상어를 사용한 대사는 가장 명료하지만 저속하다. 클레오폰과 스텔넬로스의 작품이 그렇다. 반면에 색다른 말을 사용한 대사는 평범함을 벗어나 신선하고 장엄하다. “색다른 말”은 방언이나 은유나 늘임말을 비롯하여 일상어가 아닌 모든 말이다. 하지만 온통 색다른 말로만 대사를 채우면 수수께끼나 외국어가 되고 말 것이다. 대사가 은유로만 구성되면 수수께끼가 될 것이고, 방언으로만 구성되면 외국어가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2장 대사가 갖추어야 할 특징: 명료성과 신선함”의 첫 번째 구절이다.
작년 1년은 무작정 시 쓰기에 도전한 한 해다. 아마도 내가 생각할 때, 나와 같은 방법으로 감히 시인이 되겠다고 덤벼든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쓰기만 한다고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저 내가 쓴 글을 본 몇몇 지인의 추켜세움에 장단을 맞추어 허깨비 짓을 하느라고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동안 지은 시가 엄청난 문학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도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하긴 워낙 바닥에서 시작했으니, 짐작컨대 나의 시 짓는 내공이 시작할 당시보다 더 바닥을 치고 지하로 내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섞인 자만심만 키워왔을 것이다.
시를 지으면서 다른 시인의 시를 읽기 시작했지만, 읽을수록 시가 어렵다는 생각만 더해지게 되었다. 솔직히 시에 무지한 일반인이 읽고 느끼기에는 학생 시절 책으로나 배웠던 시들과 요즘의 시들이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사실만 실감했을 뿐, 현대 시를 이해하는 데에는 시를 짓는 것 이상의 내공이 필요하다는 씁쓸한 진리만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은 그저 따라온 “덤”이었다.
가장 혼란스러운 점은 혼자 시 짓기에 도전을 계속하느냐? 아니면 적어도 보이는 모습이라도 그럴듯한 제도권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몇 개월은 되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무작정 휘갈겨 나가던 글이 잠시 멈칫거리면서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렀다.
우선 다른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내공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은 사실이었다. 시인이 취사선택한 시어와 어구가 품고 있는 원개념을 추론하는 것부터가 추리 작업에 버금가는 고난이었다. 과연 그 정도로 원관념을 비비고 틀고, 그것도 모자라서 비비 꼬아야만 멋진 시라고 치부해 주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하지만 중이 저 싫으면 떠난다고 했듯이, 그런 시류에 동조하지 못하겠다면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접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창한 공모전이나 신춘문예 같은 곳에서 당선된 시들을 읽어보면, 나 같은 아마추어 詩感者가 보기에도 멋진 표현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그 이상의 난해한 난수표와 같은 표현들도 많았다. 도무지 시인의 작시 의도를 듣지 않고서는 그 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우연히 글을 사랑하는 한 사람을 만났고, 이런 고민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책을 한 권 추천받았다. 원래 내가 지금까지는 시를 짓는 법에 대한 詩作法 서적을 단 한 권도 읽지 않고 시를 써 왔던 까닭은 어쭙잖은 신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형화된 틀에 갇힌 상태로 글쓰기를 시작하기 싫다는 나만의 확인되지 않은 원칙 같은 것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도 그랬으니까... 하긴, 그래서 지금까지 수십 년을 그렸어도 제대로 한 점 팔아본 적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나를 이해한다면서 절대로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책이라면서 추천한 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었다. 물론 어렴풋이 알고는 있던 책이지만, 솔직히 내용의 심오한 부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던 책인지라 즉시 주문해서 책을 손에 쥐고 읽기 시작했다. 시를 짓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다양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고는 했다. 물론 수천 년 전에 저술된 책인지라 혹자는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치부해 버릴지도 모른다. 솔직히 책을 읽어갈수록 나 자신을 책망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책망의 내용은 그래도 나름 프라이버시인지라 밝히지는 않겠다.
다시 돌아가서, 이 글의 서두에 옮긴 글은 내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시를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내용에 대한 명쾌한 해답처럼 느껴졌다. 또 다른 부분을 예로 들어 보겠다. “제25장 서사시에 대한 비판과 그 해결책”에서 기술된 내용이다.
~~시인은 불가능한 것을 썼다면, 일단은 잘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시의 목적을 달성했으면, 그 시가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면 정당성을 지닌다. ~~
나는 왜 타인의 시를 읽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는가? 나는 왜 정형화된 일반인의 시각에서 상상할 수밖에 없는 표현에 갇혀서 올바른 시를 짓지 못하고 있었는가? 에 대한 해답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들려주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시인의 시적 표현에는 그 시가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를 표현하고 전달하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시를 감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몇 개월의 멈칫거림을 정리하고, 조금이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세로 시를 대하고, 시를 쓰고, 시에 대한 공부를 하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어차피 인생은 끊임없는 배움의 연속이지 않는가? 배움에는 완성이 없듯이, 시인이 되기에는 나이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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