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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는 연습하기

시는 어떻게 써야 할까?

by 정이흔

시 쓰는 연습하기


정식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지는 이제 8개월 정도 되는 것 같다. 물론 시 쓰는 법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시작한 것은 아니고, 오롯이 독학이다. 그렇다 보니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시 쓰는 흉내부터 배웠다. 물론 시 쓰는 강의를 듣거나 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이른바 제도권이라고 불리는 시 창작 교실이나 문예창작과 진학을 통한 공부를 할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은 독학으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나도 그런 독학생 중의 한 명이다.




일단 여러 가지 시를 읽는 것부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시는, 마음만 먹으면 무척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시인이 너무 많다고 이야기한다. 시집 출간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오죽하면 시집을 사서 읽을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독자의 수보다 시인의 수가 더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돌겠나 싶었다. 이런 바닥에서 시를 쓰고 시인으로 행세한다는 것은, 더군다나 비전공자의 처지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각오한 바다. 그렇지만 그래도 시를 쓰고 싶었다.

시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명쾌한 대답은 아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는 모방이다.”라는 정의 이후에는 없을 것 같다. 단 두 음절로 이루어진 저 정의를 능가하는 그 어떤 정의도 찾을 수 없다는 것에는 나도 이견이 없다. 어떤 것을 모방하든지는 상관없이, 시인의 언어로 자연이든 신이든, 인간이든 감성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모방해서 그려낸다면 그것이 바로 시라는 의미로 나는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모방”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베낀다”라는 개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베낀다기보다는 “흉내 낸다”가 맞는 표현일 것이고 흉내 내는 과정에서 표현 방법의 변천이 시의 형식을 완성해 나갔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시인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 시는 어떤 형식을 갖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충이라도 글을 쓰려면 형식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조와 같은 정형화된 틀이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단어를 나열하는 형식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이 시기까지 나는 시중에 그렇게도 흔한 시작법에 관한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해진 틀을 먼저 배워버리면, 내 속에서 나오는 시상의 소리를 지극히 제한적인 방법으로 써나가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글자 수나 행을 이루는 음절의 개수나 연을 이루는 행의 개수와 같은 것을 규정해 버리면 내 생각을 어떻게 하든지 그 틀 안에 끼워넣기 위해서 갈가리 찢어서 새로 조합해야 한다는 난해한 작업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이 싫었다.


그리고 시작법에서 규정하는 금칙어나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음절을 축약하는 기술도 그렇고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과도한 수식어나 비유의 방법도 마찬가지다. 원래 모든 기준서에는 대부분 금지하는 것부터 언급하고 있다. “이런 것은 하지 말아라.”라는 제한 조건이 우선적인 가르침이다. 그런데 그 부분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것은 하지 말아라.”라는 가르침은 내가 스스로 익히는 것이 더 나의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나는 믿었다. 시작법에서 권하지 않는 표현은 내가 아닌 그 누가 읽어도 어색한 표현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초고에는 무조건 시상이 떠오르는 대로 적어 나가다가 나중에 퇴고 과정에서 수정하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운율을 보자. 운문과 산문을 가르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시가 띄고 있는 운율의 유무일 것이다. 시조가 아닌 시도 일정한 운율 위에 글을 얹은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운문으로 이루어진 시는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떤 리듬을 타고 흥얼거리게 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산문으로 된 시는 그런 운율의 맥이 거의 없다. 운율보다는 서술과 묘사와 비유의 성격이 더 많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구분이 시의 분량(길이)과는 관계없다는 것이다. 운문의 형식이라도 길이가 길 수 있고, 산문의 형식이라도 길이가 짧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점을 기준으로 시를 구분하고 있다. 물론 어설픈 나만의 분류법이기는 하다.


시의 내용이나 주제, 화두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은 단순하다. 우리가 흔히 듣는 서정, 서사니 하는 것을 포함해서 풍자도 그렇고 시의 주제에 따라서 적합한 표현 기교(?)가 있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사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상의 표현에 가장 적합한 “시어”의 선택과 시상의 전달에 가장 효과적인 “표현 방법과 비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시를 공부한다는 것은 누구든 생각해 낼 수 있는 시상을 어떤 방법으로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하는 일이다. 부단한 습작과 퇴고만이 이런 창작 능력을 높일 수 있다. 그러므로 솔직히 어느 정도는 기본적으로 자기의 시상을 머릿속에서 꺼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후라야 본격적으로 시를 짓는 방법에 관해 공부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일단 초고가 완성되면 종이에 출력해서 몇 번이고 읽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내가 누구에게든지 배운 적이 없어도 반복해서 읽다 보면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발견되기 마련이다. 단어도 그렇고 비유나 표현도 그렇고 뭐든 거슬리는 부분이 눈에 띈다. 시를 다듬는 작업은 그다음부터 시작한다. 시어의 배열은 시에서 말하고 있는 화자 중심으로 다시 배열한다. 수동태와 능동태나 시제도 세심하게 살핀다. 필요 없는 군더더기 같은 조사와 중복된 수식어도 삭제해서 문장을 간결하게 축약한다. 꼭 있지 않아도 되는 행이 있으면 통째로 삭제하기도 한다. 행의 배열에서 흐름이 전환되는 부분을 찾아 연으로 구분하는 작업도 한다. 이런 작업을 할 때 가장 기준이 되는 것은 내가 시를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지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이것은 내가 주로 사회 풍자적인 시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는 사회와 관련된 이야기가 내 시의 근간에 흐른다. 그러니 당연히 시어의 선택이나 비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시어를 선택할 때, 너무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라서 싫증 나게 느껴지는 어휘는 피한다. 흔히 힘들거나 어려운 시기는 무조건 “겨울”이라든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기간은 “깜깜한 밤”이라든지, 초승달이나 그믐달을 "손톱"에 비유하든지, 비를 “눈물”로 표현하든지, 온화함을 햇살로, 반항을 깃발로 표현하는 그런 부분을 말한다. 이런 단어는 시어로서의 생명력을 잃은 지 오래된 단어들이다. 물론 그래도 꼭 필요할 때는 동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동원하지 않는다. 시어 하나가 시를 살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시어 하나가 시를 망치기도 한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고 있다. 시인으로서 시어를 발굴하거나 造語하는 능력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능력은 타고난 점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무조건 많은 글 읽기(비단 책을 많이 읽으라는 말은 아니다.) 연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이든 기사든, 요즘 같으면 다양한 인터넷 출판물이든, 심지어는 논문이든 뭐든지 읽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에서 새로운 단어가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를 쓰는 연습은 시가 아닌 다양한 글을 쓰는 습관에서도 기를 수 있다. 흔히 생활 서식이라고 부르는 각종 서류가 있다. 그런 글을 쓰는 것이 시를 쓰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나는 예전에 그런 글을 많이 써 보았다. 독후감이나 리포트는 물론이고, 심지어 등기 신청서와 같은 법무 서식이나 소장, 준비서면과 같은 법정 서식도 전문가의 도움 없이 내가 작성한 적이 있었다. 사실 전문가가 작성하면 금방 작성하는 서식이지만 비전문가가 작성하기에는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서식도 작성해 본 경험이 있다. 결과는 물론 좋았다. 내가 작성한 글도 전문 서식으로서의 효용가치를 발휘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잡다한 글의 작성까지도 시를 짓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나의 주장의 근거는 바로 글(시)을 쓰는 준비작업에 대한 자세를 바로잡는 연습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시가 일정한 형식이 있고 나름대로 표현 방법은 있지만, 그 이전에 내가 작성해야 하는 글의 작성 순서를 조리 있게 나열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이 없으면 솔직히 시인이 되기에는 힘이 벅찬 것도 사실이다. 말하기와 글쓰기의 자연스러운 연계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말로는 잘 이야기하면서도 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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