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이흔 May 19. 2023

詩語와 日常語 사이의 고민

어떤 단어나 어휘가 시창작用으로 적당한지 모르겠다.

나는 시를 쓰면서 항상 하는 고민이 있었다. 바로 詩語에 대한 고민이다. 사실 많은 시인과 독자들이 시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그 의미를 솔직히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어의 정확한 정의부터가 나에게는 모호하기 때문이다. 단지 시를 지은 시인의 시상을 가장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읽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단어나 어휘라는 나만의 기준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를 쓸 때면 항상 고민하는 것은, 내가 쓰려고 하는 단어나 어휘가 보편적 기준에서의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시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고 하는 강박관념과 비슷한 고민이다. 솔직히 내 눈에 보아도 다른 사람의 시 중에는 눈에 확 들어오는 표현이 있다. 그렇다면 그 표현 속에 있는 단어를 시어라고 할 것인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명확하게 시어의 형태가 정의된 바 없으므로 그것이 과연 시어인지 아닌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내 생각에 시인은 글을 통해서 사람에게 기쁨, 희망, 슬픔, 좌절, 희열, 탄식, 감탄 등의 모든 감정을 전달하는 일종의 서비스업 사업자와 같은 존재라고 항상 생각해 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시를 쓰면서 너무 친절하게 “이 시는 이런 뜻을 당신에게 전하려고 쓴 글입니다.”라고 밝히는 문장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곤 했다. 물론 그런 것이 나쁜 행위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나의 시를 읽는 사람들의 사고 수준을 지극히 낮게 폄훼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가능성은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나의 시를 읽은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더라도 내가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이나 숨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감성과 지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시어에 관한 고민을 하기에 이르렀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나의 시상을 표현하지 않더라도 보다 더 정확하게 나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나 어휘를 찾는 데 시간을 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시어라고 해서 특이한 단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흔히 말하는 “시 안에 아름다운 시어들로 가득 차 있다”라는 말의 속뜻은 “일상어로 이루어진 단순한 기술이 아닌 적절한 비유와 묘사로 가득 차 있다.”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즉, 시어가 어떤 특이한 단어나 신조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 나름의 기준을 세웠다.



    

평범한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시를 지을 것인가? 아니면 일부 문단의 일부 시인에게 인정받는 시를 지을 것인가? 하는 고민은 시를 쓰는 모든 사람이 습작 초기에 겪는 갈등일 것이다. 이른바 등단이라는 것을 하고 문단에서 활동하려면 후자를 택해야 하고, 자신이 좋아서 주위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시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은 전자를 택할 것이다. 수많은 시집을 보건대 그 두 가지의 차이는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보는 시각을 바꾸면 정말 난해한 시라고 보이는 시집도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시집은 깊이 고민하면 읽지 않아도 편한 일상어만으로 시인의 감성을 멋지게 그려낸 시집도 있다. 그 어떤 쪽이 더 훌륭한 시집이라고 누구도 단언해서 말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앞에서 말한 전자와 후자의 사이에서 어중간한 입장을 견지한 것은 맞다. 그냥 편하게 시를 써서 주위의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라고 말하면서도, 제대로 된 공모전을 통해서 멋지게 등단하고, 사람들이 많이 읽는 지면에 나의 시를 발표하기도 하고, 그런 시들을 모아서 나만의 시집을 발간하기도 원했다. 앞의 전자와 후자는 각각 별개의 개념이 아니고, 시를 써가는 도중에 거치게 될 일련의 과정이라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던 것도 맞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를 씀에 있어서 고민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일 년 정도 나의 뇌리에 남아서 나에게 선택을 강요했던 두 가지 시인의 길이 결국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솔직히 장편을 연재한다는 핑계로 일상 시조차 올리지 못했던 이유 중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마음이 혼란해지니 시가 쓰일 리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점점 시작 작업에 대해서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말한다. 이렇게 나처럼 무기력감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시가 한 단계 발전할 좋은 기회라고 한다. 이 말을 돌려 말하면, 지금까지 믿고 있던 신념이 재 정립되면서 시 창작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세워진 만큼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고뇌하지 않는 시간을 보낸다면 결코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은 나도 공감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지난 일 년간 나를 흔들었던 시어와 일상어에 대한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속된 말로 국어사전에 이 단어는 시어입니다. 혹은 이 단어는 일상어입니다.라는 구분이 없는 이상 지난 나의 고민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냥 평범한 단어나 어휘를 동원하더라도, 적절한 비유와 묘사의 기법을 연구하여 나의 시상을 효율적으로 읽는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창작하는 자세로 돌아가려고 한다.  

   


 

이 글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해 본 사람이나 지금 고민 중인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쓴 것이다. 아울러 나의 새로운 각오를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함도 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260909


매거진의 이전글 시 쓰는 연습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