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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Jun 08. 2023

우리도 유명한 시인이 되어 보자.

나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될 수 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것인데, 

어제 문득 "그 밖의 나" 작가님의 글 <지천에 널린 금계국을 보고도 시를 못 쓴 이유>에서 말하신,


"멋진 시, 그럴듯한 시, 인정받기 위해 쓰는 시에서 벗어나

내가 느낀 걸 담백하게 쓰자고 시를 쓸 때마다 마음을 다집니다.


진짜 내 모습으로 시를 대해야

<진짜 시>가 내게로 와 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라는 대목에서, 나도 한 번 나의 생각을 정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써 보았다.  




시를 처음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물론 정식으로 제도권 교육을 받고 시를 쓰다가 적절한 등단(?) 절차를 거쳐서 시인이라는 호칭을 받은 사람은 이 경우에서 제외하기로 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독학으로 시를 쓰는 사람일 것이다. 

     

시에 대해, 아니 시작법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도 원래는 시인이다. 원래 시는 주변의 자연과 현상과 사물과 생명체에 대한 각자의 느낌과 생각을 글로 기술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많은 사람이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기준에 따른 시인이 되는 것이 힘들 뿐이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어떤 것이고, 다른 사람의 시를 평가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외국에서는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좋건 싫건 등단이라는 형식적인 요건을 만족시키든지, 아니면 문예지 추천이라는 제도를 통하는 것이 그나마 객관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길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그런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한 사람들이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내용과 형식으로 시를 써야만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만일 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 자신이 스스로 시인이라고 남들에게 말하고 다닐 수는 있어도 남들이 인정하느냐 하는 것까지 강요할 수는 없게 된다.  

    

그런 논리에서 보자면 객관적, 보편적 시인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더군다나 시를 짓고 소설을 쓰고, 그 행위를 생업으로 삼는 전문 문인이 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된다. 그러므로 시인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시를 짓는 것과 현실적으로 금전적인 수입이 되는 일을 어떤 형태로든 결부시키지 않는 방법이다. 그냥 글이 좋아서 시를 쓰고, 그 시를 남들이 많이 읽어주건 아니건 신경 쓰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면 누구나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시를 좋아해 주길 바라고, 좀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시집을 찾도록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쯤에서 시를 쓰는 사람의 고민이 시작된다. 막말로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시인으로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인은 시의 작품성으로 경쟁해야 한다는 말이다. 간혹 어떤 시인은 무지막지하게 돈을 들여서 시집을 마구 출간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시집을 사지 않더라도 막강한 재력으로 시집을 배포해서 인지도를 돈으로 사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생명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 무료로 배포한 그의 시집은 받은 사람의 아파트 분리수거장 폐지함으로 직행할 뿐이다. 쓰레기를 나눠준 꼴이다.   

  

이제 서설은 그만두고 본론을 이야기해 보겠다. 만일 시인으로 성공하고 싶으면 일단 유명해져야 한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누구나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누구는 유명해지기 싫어서 안 되는 것 아니냐? 혹은 유명하다면 이미 시인으로 성공한 것인데 더 이상의 무엇을 원한다는 말이냐?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시인으로 성공한다는 말은 남들이 원하는 시를 쓴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시를 썼을 때, 그 시를 읽는 사람들이 좋아해 주게 되는 것을 말한다. 알기 쉽게 이야기해 보겠다.   

  

어떤 시인이 시를 썼다. 뛰어난 문인이나 평론가가 읽기에는 그다지 뛰어난 작품이기는커녕, 시라고 할 수조차 없는 작품이라는 혹평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시인은 고민에 빠진다. 전문적인 문인이나 문단의 높은 평가를 받는 형식으로 시를 쓸 것인가? 아니면 일반 대중에게 어필하는 시를 쓸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뛰어난 시인의 초기 작품이나 말기 작품이 모두 같은 형식이나 詩潮에 맞게 지어진 작품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같은 시인의 작품이라도 시에 따라서 읽는 사람이 선호하는 시가 각각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그 말은 인위적인 어떤 기준에 따라 지은 시만이 좋은 시는 아닐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렇기에 시인은 자기가 쓰고 싶은 시를 쓰고, 그 시를 많은 사람이 좋아해 주길 원한다면 유명해지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그 시인의 작품을 한 명이라도 더 찾을 것이며, 한 작품이라도 더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같은 작가의 다양한 詩風의 시를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일단 유명해지자고 한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시를 쓰고 있으므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시를 발표하기 전에 어떤 방법으로든 나라는 존재를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더 알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런 방법으로 신문사 신춘문예나 인지도가 있는 중량급 공모전에 작품을 응모해서 당선되는 길을 택한다.  

   

솔직히 같은 시를 인터넷 공간에 발표했을 때, 시인의 경력에 신춘문예를 비롯한 다수의 공모전 입상 이력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못하고 전혀 수상 이력이 없는 경우는 아무래도 읽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긴 할 것이다. 이 시인은 활동도 활발히 하고 인지도도 높으므로 뭔가 멋진 시를 쓴 것일 거야.라는 선입견 말이다. 하지만 아무런 경력이 없는 시인의 시라면 일단 트집부터 잡는 사람이 많아진다. 물론 진정으로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까짓 경력은 보지도 않는다. 순수하게 작품이 그리고 있는 시인의 시 세계를 즐길 뿐이다. 하지만 그런 순수한 독자가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는 사실이 우리와 같은 병아리 시인을 슬프게 한다.  

    

글이 길어졌는데, 시인으로 성공하려면 함께 노력해서 일단 유명해지자. 그러면 유명해지기 전에 쓴 습작시까지도 좋은 평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말은 유명해지기 전의 형편없던 시가 유명해졌다고 갑자기 좋은 평가를 받는 시로 바뀐다는 뜻이 아니라, 유명해지기 전부터 그 시인의 시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시를 보는 눈이 올바르게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유명해지기 전과 후는 달라질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정말 일생일대에 남을 멋진 시를 써 보자. 

읽는 사람의 마음에 깊이 각인될 수 있는 그런 시를 남겨 보자. 

우리 모두는 할 수 있다. 그런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곳에 올리는 내 글을 찾아주시는 모든 시인들께 이 글을 바치고자 한다.






대문 사진은 도서출판 상상인의 진혜진 님이 쓰신 조롱박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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