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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Jul 07. 2023

시인의 변명

왜 그렇게 시를 못 쓰냐고 한다면 나도 할 말은 있다.

선입견은 중요한가?      


사실 이런 이야기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는 색다르게 다가올 수 있는 질문임에는 분명하다. ‘빈센트 반 고흐’라는 화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둥, 뭐 그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누구나 해바라기를 떠올리면서, 혹은 노란 노천카페나 방 안의 침대를 떠올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는 귀를 자른 자화상이나 우편배달부 롤랑의 초상화를 떠올리면서 대답할지도 모른다. 아, 아주 유명한 화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우리가 자라면서 주입받은 고흐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아무런 감흥도 없이 그저 떠벌린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 누가 고흐와 동시대의 생활을 하면서 고흐를 지켜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적어도 고흐가 살아있던 시대에 고흐는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다. 기껏 동생이 구입한 그림 한 점을 제외하고는 생애 전반에 걸쳐서 그림을 팔아본 적이 없는 무명 화가다. 

     

시를 쓰는 데 있어서 시인에 대한 선입견을 생각해 보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경계를 우리나라 시인으로 한정 지어 보겠다. 솔직히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국어책에 나왔던 주로 일제 강점기의 시인들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그들과 친해지기보다 아마도 무조건 시인과 그가 지은 시의 제목을 외우는 것으로부터 시인들과 가까워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험에 나오는 범위에 속하는 교과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진정한 문학청년을 제외하고는 그런 시인들에 대해서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기껏 안다고 해 봐야 틀에 박힌 문예 사조를 달달 외우는 과정에서 습득한 지식 정도만 암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 시를 쓰는 수많은 시인 군단에 대해 일일이 다 알고 있는 사람은 더욱더 적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 중요한 것은 현대 시인에 대해서도 역시 똑같은 선입견은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시인이 쓴 시가 읽는 사람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그 시인은 위대한 시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 시인이 쓴 시는 모두가 같은 수준의 시적 가치를 갖고 있을까? 정답은 아마도 ‘아니다’ 일 것이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시 중에 속된 말로 뭔가 심오한 시적 철학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시를 지은 시인일지라도 다른 시에서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모든 시의 초고는 ‘쓰레기’라는 말도 있듯이, 어떤 시인이라도 옛말처럼 일필휘지로 썼다고 해서 그 시들이 모두 훌륭한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또한 같은 시인이 쓴 시라 하더라도 시풍이 똑같을 수는 없다. 시를 짓기 시작한 시기에 따라서 시의 형식이나 묘사, 혹은 표현 방법이 다를 수도 있다. 시인이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을 접했을 당시 시인의 마음을 글로 그린 것이기 때문에, 시인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감성의 변화에 따라서 읽기에 편한 시가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때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시가 그 시인의 본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일까? 아마 시를 쓴 시인도 단호하게 잘라서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장황해지긴 했는데, 결론만 말해서 시에서의 선입견은 상당히 위험한 요소라는 말을 하고 싶다. 같은 시인의 시라도 그 시 하나하나는 각각의 생명력을 갖고 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이 서로 다른 모습을 갖고, 서로 다른 생을 살아가듯이 그렇게 시의 가치는 서로 각자 다르다. 이야기를 바꿔 말하자면, 시인의 어느 시 하나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나머지 시도 똑같은 수준의 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내가 어느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시를 좋아한다는 뜻이지 그 시인이 쓴 모든 시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시인이 초기에는 이러이러한 시를 즐겼는데, 나중에 갈수록 다른 관점에서 시를 짓기 시작했다는 등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초기에 쓴 시는 나중의 관점으로 보면 쓰레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시를 쓰고, 다음날 일어나서 들여다보면 그냥 버리고 싶은 적이 많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 시를 버리지는 않는다. 만일 세월이 흐를수록 시인의 시를 짓는 문학적 능력이 출중해진다고 한다면, 아마 죽기 직전에 지은 시만 남기고 모든 시를 파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장 좋은 전자제품은 가장 최근에 출시한 제품이지만, 사람들은 그 제품을 선택하기 전에 그 제품보다 사양이 뒤진 제품을 계속 사용해 오고 있는 것처럼, 가장 훌륭한 시를 짓기 전에 시인은 항상 끊임없이 질적 수준이 낮은 시일지라도 창작 생활을 지속해 간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것이다. 어찌 보면 지금 내가 짓고 있는 시의 수준이 낮다고 해도 점점 높은 수준의 시를 짓기 위한 끊임없는 창작 활동의 연속선상에서 시를 쓰고 있다면, 그 시들도 나름대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루아침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환호하는 시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어찌 보면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나의 시 창작 생활에 대한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함이다. 아무리 시를 써 봐도 객관적 수준에서의 시의 가치가 높아지지 않는 것에 대한 자기 위안적인 핑계를 대고자 함이다. 지금은 비록 이 정도의 시밖에는 짓지 못하지만, 나중에 가면 나도 남들이 모두 인정하는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도 독자들이 나에 대해서, 나의 시에 대해서 어떤 선입견도 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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