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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Jul 14. 2023

나는 書評을 이렇게 쓴다

나는 가끔 안면이 있는 시인들의 시집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경우가 있다. 물론 문단 어디에서도 정식으로 평론가의 지위를 부여받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종종 서평 청탁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나 나름대로 서평을 쓰는 법에 대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데, 그 원칙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다른 평론가들이 모두 공감하는 원칙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부터 정식으로 평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든지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몇 번이고 서평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만의 서평 기술 원칙이 형성되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서평을 어떤 글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점이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서평은 시(혹은 다른 문학작품도 해당하지만, 여기에서는 일단 ‘시’에 국한해서 이야기한다.)라는 형식을 통하여 쓰인 글을 읽음으로써, 그 글을 쓴 시인에게 다가가는 작업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러므로 서평을 읽는 사람은, 서평을 읽는 행위를 통하여 평론가가 어떤 마음으로 그 시를 쓴 시인에게 다가갔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평론가는 서평을 통해서, 시를 읽는 독자가 시인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행한다. 그러다 보니 평론가는 시인의 시상에 포함된 시인의 마음을 좀 더 깊이 이해해서 서평을 쓰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미로 생각한다면, 짧게는 단 몇 줄의 글로 시인의 마음을 모두 파악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으므로, 평론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서평을 쓰면서 나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창한 평론 이론은 될 수 있으면 지양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내가 평론 이론을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기술하고자 하는 방향을 어떤 이론에 끼워서 맞추는 형식으로는 시인의 마음에 깊이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론은 평론가 자신이 알고 있는 평론 이론을 능숙하게 펼치면서 시인의 시를 분석하는 말장난의 놀이터가 아니라, 시인이 뿌려 놓은 시들이 뛰노는 운동장이어야 한다. 현란한 평론 이론은 필요치 않은 대신에, 운동회가 열리는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제각각이며 열리고 있는 운동 종목도 다양한 것처럼, 시인의 시도 다양한 시상을 글로 그리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마음에서 시를 들여다보면 아무리 같은 시인이 쓴 시일지라도 시를 쓸 때의 마음은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세세한 부분을 포착해서 각각의 시를 쓸 때 가졌던 시인의 마음을 나중에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오롯이 전달해 줄 수 있도록 시인과 시를 소개해야 하는 것이 서평을 쓰는 사람의 기본적인 책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평이 어렵다는 것이다. 

     

원래 시라는 것은 시인이 창작할 당시의 시상이 온전하게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 이유는 시가 주는 느낌은 읽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서 그들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투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시어와 문장을 읽었다 하더라도 현재 겪고 있는 상황이 제각각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처한 상황과 어울리는 독자적인 해석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시에 담긴 시인의 시상(원관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시를 읽겠다고 하느냐?라고 하면서 그런 사람의 무지를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렇게 다른 사람의 무지를 탓하는 사람이 더욱 안쓰럽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무지를 탓하는 다른 독자가 오히려 시인의 마음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자기가 해석한 시의 원뜻만이 시인의 시상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는 교만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평론을 쓸 때, 전혀 모르는 사람의 시를 대상으로 평론을 쓰지 않는다. 최소한 그 사람의 작품 세계를 일부라도 확인할 수 있는 다른 출판물을 통하여 작가에 관한 사전 정보를 확인한 후에 시를 들여다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쓴 시인지도 모르면서, 시인이 그 시에 어떤 시상을 담고자 노력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시에 대한 서평을 쓰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글자 하나하나와 문구와 어절, 문장이 그리고 있는 표면적인 그림에만 현혹될 수 있다는 것도, 내가 시의 본뜻을 왜곡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원인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나의 원칙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순수하게 시를 파악하는 시야를 갖고 있다면, 당연히 선입견을 배제한 상황에서 단순히 시라는 글자의 집합만을 들여다보고도 그 시가 그리는 그림을 파악해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 주장은 당연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시인은 주위의 자연이나 현상, 사람, 동식물을 모방하는 사람이다. 그 시인이 모방을 시작할 당시에 시인과 시의 대상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시를 감상한다고 해서 뭔가 잘못된 감상 태도라고 매도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내가 전혀 모르는 시인의 시보다는,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시인의 시를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편이다.  

    

서평을 작성한 평론가는 그 평론을 읽을 독자에게 무한 책임 의식을 지녀야 한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이 잘 아는 시인의 시가, 그저 객관적 기준으로는 깊은 감명을 줄 정도는 아닌 시였다고 치자. 그런데도 평론가는 그 시에 대하여 좋은 점, 즉 독자의 구미가 당길만한 부분을 과대 포장해서 서평을 작성했고, 그 서평을 접한 불특정 다수의 한 잠재적 독자가 시집을 선택하여 구매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시를 다 읽고 나니 평론가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시가 서평에서 추켜세운 수준의 감명 깊은 작품은 아니었다면, 어떤 마음이 들 것인가? 아마도 서평에 대한, 이름 모를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아울러서 그 평론가의 평론 능력 자체에도 의구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친한 시인의 시집에 관한 서평을 작성한다고 해도 무조건 지나치게 호의적인 글로만 채워서는 안 된다. 이 말은, 그렇다고 해서 잘못 사용되었다는 명확한 확신도 없는 표현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의 가혹한 평가까지도 아끼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그저 그 시를 지은 시인까지도 서평을 읽었을 때 평론가의 견해에 대해서 지극히 긍정적인 자세로 공감할 수 있는 정도의 평가로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시인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가혹한 평가를 기술했을 때는 평론가도 자신이 기술한 부분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거의 제로섬 게임으로 치닫는 것이다. 시인의 시작법이 옳은지? 아니면 평론가의 비평이 옳은지? 이런 양상의 대결에서는 불행하게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혹은 자신만의 시작법을 끝까지 고수할 경우, 누구도 그 시를 뜯어고칠 권리가 없다. 저작권은 글을 쓴 사람, 즉 시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을수록 좋다. 어차피 시를 짓는 사람과 그 시에 대해서 평가하는 사람의 견해가 전적으로 일치할 수는 없으므로, 나는 기본적으로 시인의 시 세계를 인정하는 전제에서 출발해서 서평을 작성한다. 시인이 어떤 시상을 기본으로 시를 썼는지 뻔히 알면서도 공연히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다. 평론이 무슨 기싸움도 아니고 단지 문학작품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취합하는 일련의 과정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서평 안에서만큼은 자극적인 표현을 삼가야 할 것이다. 이런 점들이 내가 서평을 기술하면서 신경 쓰는 부분이다. 물론 그렇다 보니 나의 서평이 지극히 시인에게 호의적인 글로 도배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래도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나의 기준에 따라서만 시를 평가할 뿐이다. 나는 서평을 쓰면서 이런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나는 서평에서 그저 기술적인 부분만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서평이야말로 시인과 미확정된 잠재적 독자를 연결해 주는 끈이다. 그 시인을 처음 대하는 독자가 혹여 시인의 시적 세계에 제대로 발을 들이지 못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평론가는 독자를 시인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그래서 평론가의 역할은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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