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숙 시인의 시집 [앉은 자리가 예쁜 나이테]를 읽었다. 시인은 개인적으로 나와 시 창작 공부를 함께 했던 인연이 있기에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써 왔는지 잘 알고 있다.
사실 요즘의 현대시는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 잘 쓴 시일수록 갖은 비유와 은유, 현란한 시어들이 난무해야 한다는 어설픈 선입견이 만들어 낸 환상에 휩쓸려서 독자 스스로가 만든 올가미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다. 그래서 처음 시를 쓰는 사람일수록 어떻게 해야 읽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시를 쓸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민은숙 시인은 기본적으로 시상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를 쓰기 위해서 고민하고 생각을 쥐어짜고, 시의 형태로 억지로 맞추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민 시인은 가슴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다. 손은 그저 마음속의 시상이 시각적으로 표현될 수 있도록 거들뿐이다. 그래서 민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끝도 없이 베풀던 오라버니가 떠오른다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 볼 수 있을까
[가리비] 중에서
위의 시를 읽으면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시상을 끌어올렸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냥 먹먹한 마음을 몇 개의 단어로 나열한다. 오빠가 보내준 가리비를 손질하다 보니 불현듯 오빠 생각이 떠오른다. 그 마음은 그대로 시가 된다. 이런 모습이 시인이 시상을 떠올리는 방법이다.
시골에서 귀한 하얀 소녀
홀딱 빠진 어린 신랑이
홍조 바른 토끼풀꽃 시계반지로 청혼하고
[아카시아가 소환한 것들] 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골 풍경이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회상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현란한 시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민 시인의 시는 모두가 그렇다. 그래서 시인의 시는 읽는 데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다.
대부분 시를 쓰는 사람들은 문단에서 인정받는 경로를 통해서 등단도 하고, 신춘문예나 각종 공모전을 휩쓰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점점 어려운 시작 공부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뭔가 비비 꼬아서 원관념을 꽁꽁 싸매어 감춰 놓고 독자를 농락하는 기술을 배우기도 한다. 그러다가 한동안 고뇌에 빠진다. 민 시인도 그런 과정을 겪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시를 쓰는 것이 진정한 시인의 시작 자세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민 시인의 시집에는 이른바 서사적인 장시는 실리지 않았다. 아니, 내가 알기로는 민 시인은 그런 시의 형태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민 시인은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심각하게 고뇌하는 모습을 원하지 않는다.
가로를 훑고 지나가는
말갈기 온도는 검붉은 30도
달갑지 않아도 잘도 호출하는 벨
좋은 게 좋아서 붉히지 않는 0도의 미학
붉지 않다고 속없는 줄 아는
진드기는 섬찟한 15도
[소리가 온도를 말하면] 중에서
민 시인은 읽는 이에게 생각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시인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혹여 생각이 필요한 시일지라도 위에서처럼 지극히 비유가 어렵지는 않다. 이런 점이 민 시인 작품의 특징이다. 그렇게 민 시인은 시에서 편안함과 안락함, 그리고 다정함을 전달하고 있다.
나는 시인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정신노동자라는 생각을 해 왔다. 서비스업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읽기 편하고 쉬운 시를 쓰는 것이 시인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라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기에 민은숙 시인의 시가 좋은 것이다. 민 시인은 그 기본이 충실한 문인이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지만, 그것은 시집에 대한 예의는 아니다. 그저 시집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는 선에서 나의 역할은 끝나야 한다. 더욱 깊이 이야기를 이어가다가는 독자가 민 시인의 시를 읽지도 않고, 시인의 시 세계를 예단하도록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래서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