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평론도 써 보자.
이 평론을 쓰는 당시의 나는 정이흔이 아니다. 그저 정이흔을 잘 알고 있는 한 명의 평론가일 뿐이다. 짧은 분량의 엽편소설에 관한 평론이라고 해서 평론까지 짧으란 법은 없다. 그러므로 일단 읽기 시작했다면, 끝까지 읽어주기를 바란다.
정이흔 작가의 [탈피(脫皮)]를 읽고
정이흔 작가는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작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문학 수업도 받지 않은 늦깎이 문인이다. 이런 그를 알게 된 것은 어느 창작 지원 플랫폼에서 활동할 당시의 일이다. 그는 꾸준하게 글을 지어서 플랫폼에 올렸으며, 나름 그의 창작공간을 찾는 다른 많은 사람으로부터 창작 자세에 대한 성실성을 인정받은 작가이다.
정이흔 작가는 원래 소설을 썼지만, 정식으로 출간한 적은 없다. 그러다가 시의 세계에 빠진 후로 한동안 시를 즐겨 썼고, 몇몇 공모전에 출품했으나 고배를 마시고는 잠시 휴식의 기간을 가졌다가 다시 돌아온 곳이 바로 엽편소설의 마당이다. 본 작품 [탈피]는 작가의 스물여덟 번째 작품으로 이전까지의 소설과는 다른 작가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작가가 주로 선호했던 주제는 소설이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어느 작가의 작품보다 몰입력이 강하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가 있다. 그렇다고 일부러 읽는 사람의 호기심을 억지로 자극하려는 상황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읽는 사람은 단 몇 줄만 읽더라도 작가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런 점이 바로 작가 작품의 매력이다.
[탈피]는 삼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이다. 관찰자가 모든 것을 인지하고 있는 전지적 시점과는 다르게 관찰자는 보이는 내용만 그대로 서술하고, 그런 서술 안에서 읽는 사람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 이 작품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지훈도 아니고 윤지도 아니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처럼, 지훈과 윤지가 그리고 있는 매 장면을 지켜보면서 소설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 그 장면을 그려주고 있는 관찰자인 것이다. 작가는 지금까지의 소설에서 친절하다고 할 정도로 독자에게 주인공의 심리적인 묘사나 상황의 전개를 일일이 그려주고 있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작가를 모르는 독자는 작품을 읽으면서 도대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그저 술집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간단한 구조의 이야기 전개에서 단번에 작가의 집필 의도를 끌어낸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탈피]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기는 많지만, 정체는 베일에 싸인 여학생과 그 여학생을 짝사랑하는 남학생의 현실적인 모습을 서로 대비시키면서, 특별한 묘사도 없이 끝에 가서는 무엇인가 처음에 보여주었던 작품 내의 인물들의 다른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물론 여기에서도 작가의 노련함을 엿볼 수 있다. 이야기의 대부분을 술 취한 윤지를 걱정하는 지훈의 독백 같은 묘사로 채우고 있으며, 윤지의 대사에 대한 묘사는 호텔 앞에서 지훈에게 혼자 갈 수 있으니 그만 돌아가라는 몇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전부이다. [탈피]의 주체가 누구인지 잠시 헷갈리는 순간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베일에 싸인 사생활의 주인공인 윤지의 본모습이 밝혀지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가 진심으로 밝히고 싶은 것은, 지훈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정 형편이나 성격의 소심함, 또는 윤지를 향한 혼자만의 짝사랑의 감정에서 벗어나서 본격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등에 업힌 윤지의 가슴을 통하여 지훈의 등으로 전해지는 것은 따듯한 체온과 심장의 박동이 아니라 그때까지 의도적이든 아니든 학교생활에서 감추고 있었던 윤지 자신의 본모습이다. 아마 윤지도 자신을 향한 지훈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좁은 골목에 즐비한 오래되고 낡은 빌라촌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부유한 집안의 딸일 것이라는 추측을 무너트리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지훈을 돌려보내지 않고 그곳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윤지의 모습을 통하여 독자들이 제멋대로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려는 작가의 배려일 수 있다. 이처럼 작가는 어느 작품에서나 열린 결말을 즐긴다. 엽편소설이라는 장르의 분량 자체가 소설의 완벽한 결말까지 독자에게 전해줄 수 있는 형식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작가의 작품은 형식적으로는 엽편소설이 지향하는 분량의 작품들이지만, 실제로는 그 분량의 두세 배는 넘는 작품들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단계를 지나면 그때부터는 독자가 쓰는 결말이기 때문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작가가 제시한 소설 분량을 훨씬 뛰어넘는 결말을 그려보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이 읽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블랙 코미디 형태의 전개를 즐겼다. 소설의 기승전결이 분명하지만, 열린 결말인 관계로 소설의 끝부분은 “결”이 아닌 “전”으로 끝난다. 그것도 예측 불허의 “전”이다. 하지만 이번 [탈피]라는 작품에서는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마무리와 약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독자의 상상력을 허용하는 범위는 윤지가 부잣집 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추측뿐이고, 실제로는 낡은 빌라촌으로 들어가는 모습에서 기존처럼 “전”이 아닌 “결”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이 작가의 기존 소설들과의 차이점이다.
정이흔 작가는 노력파 작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 창작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창작 능력을 키워가고 있는 성실한 작가다. 평론가의 눈으로 볼 때, 정이흔 작가와 같은 유형의 작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가는 아니다. 단지,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작가의 문장이 세련되지 못하다는 점이다. 작가가 늘 이야기하는 대로 병아리 문인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는 작가의 엽편소설뿐 아니라 몇 편의 단편이나 장편소설도 읽어 보았지만, 그 모든 작품에서도 작가의 문장은 세련되지 못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날 것 같은 작가의 문장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너무 세련되게 다듬은 문장으로는 지금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들을 쓸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문장의 세련도는 작가가 알아서 개선해 나갈 것으로 믿는다.
정이흔 작가의 앞날을 축원해 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탈피』는 정이흔의 짧은 소설 모음집인 『초여름의 기억』의 '제2부. 상상 속에서'에 수록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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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단행본으로 출간된 [글쓰기가 두려운 사람은 책을 읽지 마라]에 수록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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