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이흔 Aug 04. 2023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고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었다. 소설의 도입부부터 나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부분은 왜 소설의 제목이 “대성당”이냐 하는 점이었다. 등장인물이라고 해야 주인공인 나와 아내 그리고 방문자인 앞을 볼 수 없는 아내의 친구인 로버트이다. 이야기의 구성은 고사하고라도 등장인물 간의 관계 설정부터 나의 예측을 벗어났다. 도대체 이런 인물 세 명으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 궁금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야기가 점점 전개될수록 나의 의구심은 증폭되어 갔다. 이렇게 분량조차 조절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설의 끝맺음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하는 불필요한 걱정만 더해갔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작가인 레이먼드 카버라는 소설가를 알지 못했고, 그의 작품세계는 더군다나 접할 수 없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소설을 주로 집필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갈수록 나의 염려가 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각적인 부분은 소설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로버트에게 있어서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단지 문밖을 나서는 첫걸음만 주의하면 된다는 의미 이외에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아무런 장해 요인이 될 수 없었다.   

  

소설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주인공과 로버트 사이에 존재하던 아내의 역할은 사라져 간다. 어차피 로버트가 주인공의 손을 잡고 주인공이 대성당의 모습을 그리는 과정에 아내는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주인공과 로버트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역할만으로도 아내의 할 일은 다했다. 사실 아내가 아니었다면 주인공이 생뚱맞게 맹인인 로버트와 마주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이후로 결국 제삼자적인 관찰자의 시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다양한 방법 중에서 로버트는 주인공에게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방법을 부탁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설득력이 있는 방법이었던 셈이다. 주인공의 펜을 쥔 손을 로버트가 자신의 손으로 감싸는 방법을 이용해서 주인공이 그리는 대성당의 모습을 느끼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눈이 보이고, 안 보이고의 문제는 떠났다. 오직 맹인인 로버트가 자신만의 사물을 보는 방법을 주인공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주인공의 눈을 감도록 해서 말이다. 주인공도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실제로 눈을 감고 그린 그림을 눈을 뜨지 않고도 느끼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마치 앞이 보이는 사람이라도 계속 주시하던 눈앞의 광경이 눈을 감더라도 잔상으로 남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사실 사람에게 귀가 있다고 모든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처럼, 앞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시력이 정상인 사람도 눈을 감고 사물을 보는 법을 익힐 수 있을지 모른다. 눈을 감고 사물을 그려보는 행위는 자신만의 세상에 자신만의 사물을 배치하는 일이다. 눈을 감아도 머릿속으로는 상상의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을 자신이 원하는 사물로 채우게 되면, 자신만의 세상이 된다. 그렇게 로버트는 자신만의 고립된 공간에서 자유를 느끼며 살고 있었다. 카버가 시력이 정상인 주인공과 맹인을 등장시켜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그런 부분은 고민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대성당은 단지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세상 밖 다른 세상의 사물일 뿐이다. 물론 그런 까닭에 주인공이 대성당이 아닌 다른 대상을 그렸다 하더라도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변함없었을 것이다. 대성당이 아닌 높은 산을 그리도록 했을 수도 있고, 로버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사물을 등장시켜도 상관없었을 수도 있다. 


소설에는 로버트가 맹인이 된 이유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사람이 맹인이 되는 이유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을 경우도 있고, 혹은 생활 도중에 예상치 않던 사건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로버트가 주인공의 손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대성당의 모습을 어디에선가, 언젠가 보았던 기억이 있었을 수도 있고, 전혀 본 적이 없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어떤 경우인지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로버트가 주인공의 손을 통해 느낀 사물이 자신이 알고 있던 사물이든 아니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강변하기 위해서이다. 시력을 도중이 잃은 경우라면, 그래서 대체적인 성당의 외양에 대한 사전 정보가 있었다면, 그렇다면 아마도 주인공에게 대성당의 모습을 그려보자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인공이 대성당 그리기를 마치자 주인공에게도 눈을 감고 계속 그려보자고 한다. 결국 여기에서 앞이 안 보이는 로버트가 주인공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림을 다 그리고, 로버트가 눈을 떠보라고 할 때도 주인공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로버트의 말이 없더라도 주인공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그 안에 들어섰다는 것을 느끼면서 소설이 끝난다.

      

이 소설을 얼핏 읽고는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래도 로버트의 정확한 메시지를 알아챌 수 없었다. 대부분 소설을 포함한 문학 작품은 어느 정도 읽다 보면 여기저기 숨겨 놓은 작가의 메시지가 눈에 띄기 마련이다. 하지만 카버의 대성당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드러내 놓고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이런 결말을 택한 이유는 아마도 읽는 독자에게도 각자만의 결말을 상상해 보라는 뜻인 것 같았다. 독자들 각자가 만든 자신만의 세계를 되돌아보라는 무언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카버는 대성당을 집필할 때, 이런 구성을 선택함으로써 보다 자신이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 수도 있다. 만일 나의 그런 생각이 옳다면, 작가의 집필 의도는 성공했음이 분명하다. 


오랜만에 아무 생각도 없이 책을 집어 들었다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을 읽었다. 


이 글은 단행본으로 출간된 [글쓰기가 두려운 사람은 책을 읽지 마라]에 수록된 글이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26090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