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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Aug 08. 2023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을 접하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소설의 제목치고는 정말 적응이 안 되는 제목이다. 누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이 아니랄까 봐, 제목부터가 나의 상상을 슬그머니 짓누르고 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별것 아닌 것은 무엇이고, 도움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소설의 시작은 그저 평이하다. 아들의 생일파티에 쓰려고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부터 나는 잠시 레이먼드 카버만의 독특한 묘사와 전개 방식을 접할 수 있었다. 나는 흔히 소설을 읽으면서 꼭 그 자리에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표현이나 묘사는 될 수 있으면 삽입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편인지라, 빵집에서 벌어지는 케이크 주문 장면을 그리는 카버의 친절함에 약간은 지루함을 느꼈다. 기껏 주인공도 아닌 조연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빵집 주인에 대한 상상적 묘사가 왜 필요한지는, 처음 소설이 시작할 때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설의 결미에서 보여준 빵집 주인의 역할을 이해하고 나니까 처음에 빵집 주인에 대해 친절할 정도로 길게 묘사한 이유가 설명되었다. 

    

케이크 주문을 받으며 직업적으로 무뚝뚝하게 필요한 이야기만 잘라 말하던 빵집 주인의 성격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빵을 찾아가라고 전화하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빵집 주인이 케이크를 주문한 고객의 사정을 일일이 배려해서 케이크를 찾아가라는 전화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케이크의 주인공인 스코티가 생일 아침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빵집 주인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몰랐으니 찾으러 오겠다는 시간을 넘긴 케이크를 주문한 고객에게 케이크를 찾아가라고 연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스코디의 부모는 아이가 사고를 당해서 누워 있는데도 매정하게 그까짓 케이크 때문에 신경을 거스르는 전화를 한 빵집 주인이 야속해 보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빵집을 찾아가서 주인에게 화풀이하지만, 빵집 주인이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주문하고는 찾아가지 않은 케이크를 찾아가라고 한 것이 그렇게 욕먹을 일인지 정말 알 수 없었다. 스코티의 부모는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혼수상태에 빠진 아이를 생각하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더운 화덕 앞에서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빵을 구워대며 생계를 유지해 온 빵집 주인의 처지에서는 스코티의 사고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주문한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아서 상하게 만든 스코티의 부모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모두 나름의 사정이 있다. 

    

스코티가 깨어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서 부모는 점점 불안함이 증폭된다. 아무리 의료진이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그들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버가 그리고 있는 불안함은 스코티의 눈이 잠시 떴다가 감기는 순간 정점에 이른다. 스코티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고, 그렇게 부모의 곁을 떠났다. 사고를 당한 지 불과 이틀만의 일이다. 나는 글을 읽으며 순간순간 스코티 부모의 심리상태를 읽을 수 있었다. 세련되지도 않은 둔탁한 묘사에 불과하지만, 의사의 말과는 다르게 깨어나지 못하는 아이를 보는 부모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런 부모의 마음이 결국 주문해 놓고도 찾아가지 않는 케이크를 바라보는 빵집 주인의 심정과 겹쳐 보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위급한 스코티의 병세를 기껏 찾아가지 않고 남겨진 케이크에 비유하냐는 등의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서 가장 그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있는 법이고, 그런 순간을 맞는 심경은 당사자가 아닌 바에는 서로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빵집에 찾아와서 거의 행패를 부리다시피 하는 스코티의 부모에게 빵집 주인은 나름대로 하소연한다. 자기는 그렇게 몰인정하고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말이다. 케이크의 주인공이 그런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 자기로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는 입장을 강변하지만, 이미 그는 마음속으로부터 스코티 부모의 심경에 공감해주고 있었다. 뒤늦게 빵집 주인의 말을 들은 스코티의 부모는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반대로 빵집 주인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정말 생각해 보면 서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리고 그렇게까지 화를 낼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각자의 속을 보였다. 만일 빵집에 찾아간 스코티의 부모가 빵집 사장에게 처음부터 윽박지르는 태도로 말할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케이크를 찾아가겠다는 시간 약속을 어겨서 미안하다고 했다면 소설이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소설가라면 그렇게 마무리를 짓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나도 공감할 수 있었다.      

스코티의 부모는 빵집 주인이 내어준 빵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점차 안정된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자식이 죽었는데 빵이 입으로 들어가냐고 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빵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음식물을 섭취하는 행위가 아니라 빵집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서로에게 위안을 나누는 화해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이 부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소설의 제목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위안이 되는”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서로에게 힘든 일이 역설적으로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도 있다는 간단한 이치를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레이먼드 카버는 어떻게 생각하면 단순한 사건에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아이의 교통사고와 혼수상태에 빠진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경에, 교묘하게 빵집 주인을 등장시켜서 서로 다른 상황에 빠진 인간의 속마음을 자연스럽게 끌어내서 보여주고 있다. 

각자 서로를 바라볼 때, 자기의 입장을 먼저 내세울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단순한 메시지를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내가 소설을 너무 가볍게 본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 이유는 소설의 제목에서 찾을 수 있다.     

 

이로써 레이먼드 카버의 두 번째 작품을 감상했다. 처음 작품을 접할 때보다는 조금 더 카버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말 그대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나도 카버가 나누어주는 빵을 맛있게 먹은 느낌으로 소설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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