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법(詩作法)
말 그대로 시를 짓는 법이라는 뜻이다. 아마 시를 공부하는 사람치고 이 단어에 대해서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중에는 차고 넘칠 정도로 시작법에 관한 서적이 출간되어 있다. 문예 창작을 공부하는 대학의 학과에서도 물론 필수 과목일 것이고, 각종 문화센터, 혹은 비슷한 시 짓기 교실에서도 한 번쯤은 언급되고 있는 개념일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시작법 서적이 딱 한 권 있다.
느닷없이 왜 시작법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내가 뛰어난 시인이라거나, 시작법 강사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밝힌다. 우선 간단하게 시작법 서적들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내가 갖고 있는 서적의 목차를 참고로 했다. 물론 다른 서적의 목차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시적 표현의 이해 (시적 표현은 어떤 것인가? 추상어와 보편어를 비롯한 각종 시적 언어의 개념 등)
-시적 대상의 인식 과정 (시적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 시적 관점 등)
-시적 묘사 (각종 시적 묘사, 묘사와 설명의 차이, 묘사의 언어와 수사 등)
-시적 묘사의 구조와 시점 (서정적, 심상적, 서사적 구조와 시점의 가치 등)
-시적 진술 (각종 시적 진술, 넋두리, 독백, 피상적, 권유적, 진술과 묘사의 어울림 등)
-시적 진술의 구조와 시점 (독백적, 권유적, 해석적 진술)
-시적 화자 (시적 화자, 숨은 화자와 시 속의 역할, 화자와 지각의 변화 등)
-비유와 활용 (비유의 종류와 의미 등)
-시의 구조와 행, 연 (시의 행과 연에 관한 모든 내용)
-의도적 의미와 실제 의미 (작품과 의미, 의도와 시작 과정 등)
이상은 (현대시작법, 오규원 지음, ㈜문학과 지성사)를 참고하였다.
여러분들은 앞의 목차를 보면 금방 눈치챌 것이다. 적어도 시를 쓰려면 어떤 내용들을 공부해야 하는지 말이다. 일단 목차의 내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정식으로 시작법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시작법은 시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공부라고 한다. 나 역시 그런 의견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내가 그나마 한 권뿐인 시작법 책을 읽어 보고 느낀 것은, 시작법 책이 시를 짓는 데에 만병통치약은 아닌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제대로 시를 짓지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 항변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오해는 말라. 내가 그렇다는 것이지, 시작법 책의 무용론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내용의 글을 올림으로써, 시작법에 대해서 친숙하지 않던 일반 시 독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기 위함이니 말이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시작법 책을 맹신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목차를 보았을 때, 저 정도를 통달하면 시를 짓는 것은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시작법 책을 당장 덮는 것이 좋다. 시작법 책은 당신의 시적 대상을 묘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일 뿐, 시를 지어주는 AI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어떤 대상을 어떻게 그리고 싶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그때라야 비로소 시작법이 도움이 되는 것이지, 시적 대상부터 찾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법이 시를 거저 지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시작법을 달달 꿰차는 것으로는 절대로 제대로 된 시를 짓지 못한다.
두 번째, 시작법에서 예시로 들고 있는 시의 표현과 묘사 방법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말 것을 권유하고 싶다. 혹자는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시적 표현, 이른바 시어와 묘사 방법을 많이 확보한 후 무슨 운전면허 문제 은행에서 문제를 꺼내서 시험문제 출제하듯이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시어 사전에서 적당한 시어를 꺼내어 조립하면 시를 수월하게 지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다양한 시어를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도움이 된다는 말은 말 그대로 어휘력의 폭이 넓어져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뜻이고, 해가 된다는 것은 그 시어 사전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점점 힘들어져서 더 이상 새로운 시어의 발굴이 불가능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어나 표현, 시적 묘사의 예시에 너무 깊이 빠지지 말 것을 권한다.
세 번째, 자기만의 시적 대상을 찾았어도 묘사의 단계에서 지나치게 시작법이 일러주는 거의 공식적인 틀에 맞추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 것을 권한다. 시작법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어떤 경우에는 서로 상충하는 때도 가끔 있다. 문장은 간결할수록 좋다고 하다가도, 직접적 묘사를 피하고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할 것을 권하기도 한다. 또, 어떨 때는 너무 돌려 표현하지 말고 의미의 전달이 확실하게 표현하라고 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이런 점은 그냥 예시에 불과하다. 시작법을 깊이 파고들수록 자가당착적인 모순을 경험할 경우가 종종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책에 예시로 적시된 시적 표현에 너무 깊이 빠지지 말 것을 권한다.
네 번째, 그럼에도 나는 적어도 한 권 정도는 읽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시작법을 모르고 시를 짓는 사람은 하얀 백지에 자기 멋대로 그림을 그리는, 그림을 그려본 적이 전혀 없는 어린아이와 같다. 여러분은 아이가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처음부터 그림이란 이런 것이고, 산을 그리려면 이렇게 그려야 하고, 사자를 그리려면 갈기를 그려야 하고, 코끼리를 그리려면 코를 길게 그려야 하고 하면서 일일이 설명할 것인가? 아니면 아이가 알아서 그리라고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나 같으면 처음에는 마음대로 그리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 아이는 더 이상 괴상한 형태의 그림을 그리지 않고 제대로 형태를 잡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간혹 어쩌다가 형태를 무시한 추상적인 그림을 그릴지도 모른다. 아무튼 처음의 그림보다는 훨씬 발전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것이고, 아이 스스로 이건 어떻게 그려? 하고 물어보면, 그때 약간의 도움을 주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시를 짓는 것도 비슷할 것이다. 시를 지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시작법을 맹신하다 보면 오히려 시를 짓고 싶은 마음을 짓누르는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시작법은 시를 짓기 위해서 꼭 필요한 책일 수도 있지만,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짓누르는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필요악 정도로 생각해야 할까? 그렇지만 결론은 한 권 정도는 읽어 보아도 손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설픈 논리로 시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이만 줄이려고 한다. 그저 시작법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먼저 지나온 길을 알려주려는 의미 밖에는 없는 글이므로 이 글 역시 맹신할 필요는 없다. 나도 처음에 시작법을 불신하면서도 궁금하길래 주위 사람이 권하는 책(앞의 오규원 著)을 한 권 읽고는 책꽂이에 곱게 모셔 두었다. 물론 가끔 꺼내서 읽기는 하지만, 아마 처음부터 정독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시를 공부하는 시인들께서도 얼마든지 훌륭한 시를 지을 수 있으므로, 시작법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고 열심히 창작하시기를 기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