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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May 24. 2024

박영 작가의 <이름 없는 사람들>을 읽었다.

박영 작가의 <이름 없는 사람들>을 읽었다. 집 앞의 작은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다. 가정용 주택을 개조한 도서관이며 열람실은 없는 그저 대출 전용 도서관이라고나 할까? 그런 곳이었다. 초등학교 앞이라 그런지 아동 도서가 많았고, 방으로 사용되었던 공간인 듯한 곳에 어른들을 위한 도서가 몇백 권 정도 서가에 꽂혀 있었다. 둘러보다가 장편소설로 두 권을 골랐는데, 그중 한 권이 박영 작가의 책이었다.

      

박영 작가는 2015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아저씨, 안녕>이 당선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2017년 첫 장편소설 <위안의 서>로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8년 두 번째 장편소설 <불온한 숨>을 발표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은 2019년 ㈜은행나무에서 출간된 책이다.

     

소설의 시작은 보험금을 노린 조직적 대부업자의 뒤처리를 해 주는 주인공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돈이 급한 사람에게 생명보험증에 서명을 받고 돈을 빌려준다. 채무자는 쉽게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결국 자기의 몸으로 빚을 갚아야 한다. 자살은 보험금이 나오지 않지만, 실종자로 처리될 경우 3년 뒤에 보험금이 나온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채무자를 강제로 실종시키는(?) 그런 사업을 벌인 것이다. 그러니 빚을 갚지 못하고 실종 처리된 사람은 3년 후에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때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이런 비인간적인 사업은 철저히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채무자가 잠적할 경우를 대비하여 감시 추적조와 실종 처리조가 별도로 일을 처리한다. 그들은 모두 대부업자 ‘제’에게 빚이 있는 사람들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할 때마다 빚에서 일부분을 탕감받는 조건으로 이 일에 동참한다. 물론 자발적일 리는 없고, 빚에서 벗어날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울며 겨자 먹기로 제의 사업에 동참한다. 이런 구조의 출발이 지금까지 읽었던 몇몇 소설과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제는 그렇게 번 돈으로 재개발 예정지의 지분을 사들여서 새로운 왕국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주인공 진우를 중심으로 파헤쳐지는 사회악이 잠시 가슴을 찌른다. 공장 지대에서 발생한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 번지지 않도록 일부러 화재를 일으키고, 그곳의 사람들이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짐승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느니 하면서 지역 전체를 차단한다. 그곳에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귀가 존재한다는 설정은 어떻게 생각하면 죄 없는 사람들을 화마에 휩쓸리게 내몬 인간들에 대한 반어법적인 표현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곳의 사람들이 정상이고, 그들을 그런 생활에 빠지게 만든 사람들이 식인귀가 아닐까? 

    

진우는 사람을 한 명 처리할 때마다 빚에서 일정 금액을 까나 가다가 이제 마지막 오더만 앞두고 있었는데, 마지막 오더에서 의도치 않은 상황에 놓이면서 실패하게 된다. 처음 어릴 적에는 감시조와 추적조 생활을 거쳐서 처리조로 생활하면서 빚을 갚기 시작한 지 거의 10년도 넘는 기간 동안 빚을 갚았고, 이제 한 건만 처리하면 자유의 몸이 될 텐데 실패함으로써 그 조직에서 빠져나올 길이 막막해진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뜻하는 의미는 소설의 마지막까지 가서야 명확해진다. 진우는 사람을 처리할 때마다 ‘제’로부터 새로운 신분을 얻는다. 물론 ‘제’가 그 신분을 어떻게 확보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같은 일을 했던, 그리고 진우보다는 조금 앞서 나갔던 서유리라는 여자로부터 ‘제’가 신분을 확보한 방법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극심한 갈등에 빠지게 된다. 진우가 사용했던 이름은 모두 그가 감시했던 인물들의 이름이었고, 그들은 장기 밀매의 희생자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 다음 장기 밀매의 대상이 자기가 되어버린 상황 앞에서, 자기가 아무리 빚을 다 갚고 자유를 얻고자 해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쯤에서 작가는 새로운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타깃을 처리하기 위하여 식인귀의 활동 지역에 들어간 진우는 밖의 세상 사람들의 말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진우는 살기 위해서 살인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외지인의 출입을 막아야 했다. 은거지 입구에 죽은 사람의 시신을 나무에 장막처럼 걸어두고, 이방인의 접근을 감지할 목적으로 풍경을 매단다.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그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어차피 죽은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름도 필요 없었다. 그들은 나무 밑에서 갖고 온 망자의 유품을 제단에 모시고 명복을 빌어준다. 그들은 외부의 사람들이 자기들을 식인귀로 부르면서 다가오지 않기를 오히려 바라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을 기억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냥 이름 없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소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제’를 찾아와서 돈을 빌리는 사람들이나, 공장 지대에서 방화범의 오명을 쓰고 식인귀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림으로써, 사회 계층 간의 극단적 분열과 대립의 관계를 절묘하게 보여주고 있다. 살기 위해 죽이는 설정은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이 사회에는 육체적인 살인자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살인자가 존재하지 않는가? 작가는 그런 현실을 교묘하게 꼬집고 있다. 살기 위해 살인하고, 벗어나기 위해 살인하지만 결국 자기가 ‘제’와 같은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는 괴물이 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 건진 희망이 이름을 버리는 길이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 자기의 자유를 박탈한 자에게 대항하여 싸우고, 그를 처치해도 결국 그의 모습 안에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그저 공기같이 평소에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처절하게 매달렸어야 하는지,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서 작가가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몰입감이 너무 깊어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박영’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서 오늘 하루 일과에 보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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