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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Sep 05. 2024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_ 최진영

서평도 아니고, 평론은 더욱 아니고, 작품해설도 아니고, 뭐라고 부를까?

0. 이름조차 없는 어느 소녀의 성장통     

 

“내 이름은 ‘언나’다. 황금다방 언니들은 나를 그렇게 부른다.” 

첫 문장부터 읽는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다. 어떤 글이건 첫 문장의 중요성은 똑같다. 하지만 최진영의 소설 내용은 독자가 이 한 문장으로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다. 이름이 사람의 얼굴인 시절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당신 옆을 스쳐 간 그 소녀의 이름은’이라는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우선 이름이 어쨌다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다. 일부러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작가가 작중 인물의 이름이 주는 첫인상에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을 어설프게 감추어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가능하게 해준다. 독자는 물론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그 숨바꼭질에 참여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 이상의 심오한 시간적이고 관념적인 투자는 필요치 않다. 이 소설은 본명이 드러나지 않은 한 어린 소녀의 성장 이야기이다. 특이한 것은 소녀를 부르는 다양한 이름에 따라 나뉜 각 장이, 각각 하나의 단편을 읽는 기분이 들게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각각의 장마다 서사가 따로 있고, 그 서사가 이어지면서 소녀의 성장은 끝난다. 물론 작가의 필력이 고도의 몰입감을 불러오면서 애초부터 그런 장의 구성이 무의미해 보이기는 했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 구성에서부터 작가의 고뇌와 그에 걸맞은 치밀함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만큼 편안한 최진영의 이 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은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이년’, ‘저년’에서 ‘언나’와 ‘간나’, 그리고 ‘꼬마’와 ‘유나’가 소녀의 이름이었다. 얼핏 읽으면 그저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절묘하게 소녀의 성장기에 걸맞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소녀는 이름이 없던 것이 아니다. 그저 일상의 언어로 그려낸 성장기에 어울리는 이름을 그때그때 골라서 빌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창작 의도를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 할 필요가 없다. 소설 안에 감춰진 깊은 철학을 찾으려 헤매지 않아도 된다. 단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작명의 변천사를 통해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작가의 세계관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이 소설은 읽는 독자에게 쓸데없는 분석과 고민, 그리고 통찰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독자의 시선을 용케도 붙잡고 있는 것은, 의외로 평범한 일상어의 나열과 간혹 등장하는 노골적이고 숨김없는 성적인 저속한 표현의 연속이다. 사실 소녀의 추정 나이를 생각해 보면 그런 지극히 성적인 표현의 구사에 관심을 둘만 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가 늘어놓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울 만큼 순화되지 않은 언어의 나열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물론 작가가 지극히 의도적으로 그런 단어를 소환했으리라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런 전개는 작가가 그저 순수할 정도로 솔직한 성격의 인물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1. 이년 저년, 그리고 무책임   

  

사실 소녀가 이년, 저년으로 불리게 된 경위는 모른다. 하지만 ‘년’이라는 어휘가 풍기는 느낌은 결코 즐거운 것은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다. 소녀에게는 정말 ‘가짜 아빠’와 ‘가짜 엄마’라고 불리기에 아주 적당한 부모가 있다. 소녀는 자신이 ‘진짜 부모’에게서 버려졌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버려졌다는 말보다는 주워 왔다는 말을 더 일찍 접한다. 다리 아래에서 주워 왔다고 한다. 말을 안 들으면 다시 내다 버린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도 생각보다는 많다. 아이는 생각에 잠긴다. 아이를 주워 오고, 버리는 것은 책임 있는 행위가 아니다. 그런데 하필 그런 말끝에는 ‘년’이나 ‘놈’, 혹은 ‘새끼’라는 말이 따라온다. 그런 집안들은 대부분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책임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다. 아빠는 무능력에 무기력, 의도적인 자발적 실업자, 술주정뱅이, 가정 폭력범, 심지어 친딸을 강간하는 성폭행범까지 다양한 얼굴로 가정 안에 군림한다. 그에 비해 엄마는 무기력, 무능력, 순종, 굴복, 가정폭력 피해자, 그러다가 가출자의 모습까지 갖추고 가정의 가장자리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한 채,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물론 작가가 그런 모습을 염두에 두고 소녀의 가정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소녀는 분명 무책임한 어른에 의해 그런 가정에 던져진 무기력한 생명체였다. 소녀가 함께 살고 있는 부모를 가짜 부모라고 믿고 싶은 이유는 부모의 무책임이었을 것이다. 소녀는 가정 내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개뿔, 아무것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냥 ‘년’일 뿐이었다. ‘년’에 따라오는 무책임은 엄마의 구멍을 찢고 바깥으로 나온 그 순간(19쪽)부터 시작되었다. 딸을 가짜 부모에게 버린 진짜 엄마의 무책임임과 동시에, 딸을 딸로 대해주지 않은 가짜 부모의 무책임이다. 

    

가짜 아빠를 갉아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쥐새끼 떼는 또 다른 소녀 바로 그 자신이다. 온통 무책임 덩어리인 소녀의 가정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쥐새끼들이 등장해야 한다. 쥐새끼는 무책임한 가짜 아빠를 갉아 먹어 버릴 것이고, 가짜 엄마는 그 지독한 가짜 아빠 냄새로부터 도망칠 것이지만 쥐새끼는 번식력이 좋아서 금방 가짜 엄마를 찾아낼 것이다. 그렇지만 진짜 소녀는 기차를 타고 아주 먼 곳으로 떠나면 쥐새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가짜 가정을 해체될 것이다. 소녀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소녀는 쥐새끼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책임은 가짜 부모뿐 아니라 진짜 부모에게도 있다. 흔히 그러지 않은가? 무책임하게 싸질러 놓는다는 저속한 표현처럼 작가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작가가 소녀의 이름을 정상적으로 불러주지 않은 까닭은 이런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를 칭하는 여러 이름 중에서 ‘년’을 가장 먼저 등장시킨 이유는 당연히 살아가기 전에 죽음부터 생각하곤 했던 소녀의 운명을 가장 밑바닥부터 출발하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작가는 지극히 계산적인 전개를 계획했을 것이고, 그런 의도는 가히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년’이 자라면서 객관적 시각에서의 바람직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의도한 대로 그릴 수만 있다면, ‘년’보다 더 좋은 이름의 시발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성장은 없었다.  


         

2. 언나를 향한 멸시

     

무책임한 가정을 뛰쳐나와 잠시 머문 곳은 기차역 근처의 황금다방이다. 기차역은 항상 떠나는 곳이다. 소녀에게 있어서 기차역은 가정으로부터 나와서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 있는 시작점이었기에 매우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그곳에는 가짜 부모와 함께 살아가던 집과는 전혀 다른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가정이 존재한다. 소녀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사내아이도 있고, 진짜 엄마였으면 하는 다방 종업원 언니들도 있다. 그곳에서 소녀는 비로소 이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자신을 지칭하던 ‘이년’, ‘저년’에서 좀 더 자기만의 이름이 갖고 싶어진다. 소녀에게 이름을 갖는 행위는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인정받는 과정처럼 보인다. 다방 마담의 아들 찬수도 이름이 있고, 소녀에게 잘 대해주던 장미 언니도 이름이 있다. 물론 소녀는 그 이름이 진짜 이름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소녀는 찬수나 장미 언니처럼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름을 하나 갖는 것도 소녀에게는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래지 않아서 깨닫게 된다. 그러는 도중에 원치 않게 얻은 이름이 ‘언나’이다. 마담은 걸핏하면 소녀를 ‘언나’라고 불렀다. 은연중에 무시하고 멸시하는 마음을 눈에 띄지 않게 잘 접어 넣어서 말이다. 드디어 소녀도 이름을 갖고 집안 이외의 장소에서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소녀는 집 밖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모른다. 작가가 설정한 소녀의 처지가 가여워지는 순간이다. 

    

가짜 아빠는 소녀를 때리고, 가짜 엄마는 소녀를 굶기는 환경에서 탈출해서 비록 얻어먹는 처지이긴 해도 다방 식구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소녀는 찬수에게서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다. 추측건대 열한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자기와 비슷한 사내아이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과정은 생각 외로 단순했다. 찬수의 숙제를 대신 해주는 행위는 사실 소녀가 더 똑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똑똑해지는 것 역시 소녀에게는 생존의 방식 중의 하나임을 넌지시 일러준다. 나눗셈을 이해해야 먹을 것도 생겼기 때문이다. 소녀에게는 남녀의 외설적 행위에 대한 어설픈 지식도 찬수에 대한 우월감을 과시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마담은 소녀를 경멸하고 멸시한다. 마담의 생각에는 찬수는 고귀하고 순결한 정신의 소유자인데, 못되어 먹은 소녀가 찬수에게 나쁜 것만 가르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언행에서 보여주는 것은 소녀의 성적 성숙도는 아니다. 소녀와 찬수의 대화에는 작가가 의도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표현이 가득하다. 너 마담이 홀딱 벗은 거 본 적 있어? (30쪽) 혹은 엄마 보지에 아빠 자지를 넣어야 아이가 생기는 거야. 라든지, 진짜로 봤으면, 그럼. 너 보지에 자지를 집어넣는 것도 봤겠네? (32쪽) 같은 대사는 글자 그대로 외설적 본연의 의미만을 간직한 것은 아니다. 소녀에게 남녀가 섹스하고 아이를 낳는 행위는 무책임의 시작이며,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그런 무책임한 행위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행위임과 동시에 경멸의 대상인 행위, 즉 자신을 그런 세상에 태어나도록 한 진짜 부모의 섹스를 소녀는 조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그렇게 무책임과 멸시 속에서 자신이 서야 할 곳을 찾아가는, 확실한 목적지도 없는 여행을 황금다방에서 시작하고 있다. 

     

기껏 열한 살 소녀의 입에서 단지 그런 표현이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황금다방의 마담이나 다른 어른들은 소녀를 보통의 그렇고 그런 되바라지고 발랑 까진 가출 소녀 취급을 한다. 그런 어른들은 당연히 소녀에게 있어서 가짜 인생들이다. 소녀는 황금다방의 방안 창을 통해 보이는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진짜 엄마를 찾으러 떠날 생각을 키운다. 사실 아무리 시대적 배경이 그렇다 하더라도 소녀 나이의 여자아이가 혼자 집을 나와서, 뭇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환경을 홀로 지나쳐 가는 상황을 그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언나’도 가슴만 달리면 바로 남자에게 붙어먹을 종자야. 이 종간나, 가슴 달리고 밑구녕에 털만 나면 바로 남자에게 붙어먹을 년. 저 언나 조만간 여기에서 댁들 뒤봐줄 년이오. (38쪽) 라는 마담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어린 여자아이라도 외모와 체형이 여자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만 하면 소녀가 ‘거시기’의 길로 빠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세상에 소녀를 풀어놓는 작가의 마음속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이다. 아마 작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그저 소녀가 겪을 여정을 암시하기 위해서 ‘거시기’를 계속 언급했는지도 모른다. 언제쯤 되어야 소녀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3. 간나에게 주는 측은함 

    

가짜들만 득실거리는 황금다방을 나와 보니 소녀는 갈 곳이 없었다. 아직 적당한 이름을 짓지도 못했고, 진짜 엄마를 찾으러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기차역 플랫폼에 서 있어 봐야 갈 곳이 없었다. 그때까지 가짜라고 믿었던 사람들 틈에 처음으로 진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싶은 할머니가 등장한다. 할머니는 소녀가 이전에 만난 사람들과 전혀 딴판인 사람이었다. 진짜와 가짜는 둘째치고라도, 소녀 주변의 인간관계가 무책임과 멸시에서 책임과 측은함으로 상황이 호전된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여전히 이름이 없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소녀를 ‘간나’라고 부르면서 소녀는 ‘간나’가 된다.    

 

할머니는 소녀에게 노란 스웨터도 만들어 주고 학교에도 다니게 해주려고 한다. 노란색은 봄에 피는 개나리꽃 색이다. 그렇다고 과대 상상할 필요까지는 없다. 할머니가 소녀의 생 한가운데로 들어와서 봄날 같은 날들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진짜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 믿는 소녀가 가엾을 뿐이다. 물론 할머니의 식당도 완벽한 장소는 아니다. 작가는 이즈음에서 소녀의 성장기에 완만한 연착륙을 시도하고 있다. 소녀가 언제까지 이름도 없이, 부모도 없이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머니 자신이 진짜 할머니든, 진짜 엄마가 되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생뚱맞게 소녀의 본명을 노출할 수도 없다. 그냥 지금까지와는 다른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뿐이다. 할머니의 문맹을 일깨워 주기 위해 소녀는 할머니의 시선이 닿는 사방에 글을 써서 붙여놓는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황금다방 마담 아들 찬수의 숙제를 해주면서 과시했던 우월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행위이다. 그와 동시에 태백식당에는 찬수에게 행했던 것과 같은, 외설적 언행을 통한 우월감을 표할 상대도 없다. 식당은 소설의 시작부터 이어 온 소녀의 행실에서 그나마도 지극히 평범한 그 나이 또래의 소녀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공간이다. 얼굴이나 실체를 모르는 진짜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거창한 목표가 잠시 고개를 숙이는 시점이다. 어차피 얼굴이나 나이도 모르지 않는가? 젊은 여자이면 어떻고, 나이 많은 여자라면 어떤가? 소녀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진짜 엄마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지만, 그런 소녀의 감성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작가가 잠시 옆으로 새어 나가던 소녀의 인생을 다시 되돌렸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도 가짜는 존재했다. 물론 소녀의 가짜와는 다른 의미일지는 몰라도 소녀의 눈으로 보기에 가짜임이 분명했다. 할머니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작가는 종종 사회적으로 문제시되는 상황을 그려보려고 한다. 수십 년 동안 버려두었던 자식의 사망보험금을 차지하려고 장례식장에 얼굴을 들이미는 진짜의 탈을 쓴 가짜 부모가 당당하게 얼굴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부모는 양육의 책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양육의 책임이란 단지 법적 시선에서만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할머니와 자식 사이의 관계는 할머니와 소녀와의 관계와 절대 같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작가는 넌지시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와 동시에 역시 무책임의 선상에서 연속되는 상황이지만, 이번에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무책임에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무책임으로 관점을 전환한다. 할머니 아들 가족은 지금까지 할머니를 부양한 적이 없다. 부양은커녕 계속하여 할머니에게 손을 벌리며 살아왔다. 그것 역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무책임이다. 그런 아들 가족의 무책임한 행위는 곧바로 소녀의 심리적 안정 상태에도 돌을 던진다. 자연스럽게 태백식당에서 소녀의 자리는 사라져가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을 보호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할머니도 결국 진짜라고 생각된 핏줄에 굴복하고 만다. 소설의 곳곳을 살펴보면, 양육의 책임은 단언컨대 소설의 전반을 어우르는 키워드이다. 동시에 그 양육은 어느 한 편의 일방적 의무도 아니다. 소녀는 할머니와는 다르게, 할머니를 끝까지 지켜주려 했지만, 결국 가짜로 판명된 할머니를 소녀는 마음속에서 불태우고 만다. 소설 곳곳에 드러나는 소녀의 불태우는 행위는 소녀가 가짜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마음속에서 지우는 행위다. 그렇게 가짜를 지워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진짜만 남을 것이고, 그런 진짜들 가운데 자신의 진짜 엄마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할머니의 가족이 등장해서 소녀가 쫓겨나듯 태백식당을 나오는 장면은 작가가 순순히 소녀의 여정을 마무리할 의도가 없음을 보여준다. 새끼가 뭐라고, 내 속으로 낳은 내 새끼 때문에 내가 죄인이 되나. (107쪽) 라는 할머니의 독백이 소녀에게 한 번 더 가짜와 진짜를 더욱 명확히 가르는 기준을 제공하고 있다. 이쯤이면 소녀가 찾는 진짜 엄마에 대한 가치의 확신을 접을 만도 한데, 소녀는 그러지 못한다. 할머니가 아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진짜 엄마도 소녀를 자기 속으로 낳았다면 지금 소녀와 이렇게 떨어져서 지낼 리가 없는데 말이다. 할머니와 헤어지면서 소녀는 점점 성장 욕구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 단지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 지 아직은 미처 알지 못할 뿐이다.



4. 차명(借名) 속의 성장 

    

소녀는 여전히 이름이 없다. 하지만 할머니와 사는 동안 소녀는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는 법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버림의 연속이었다면, 이제는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을 버릴 생각까지도 할 줄 알게 되었다. 이름이 없으면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내면 된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이름을 잠깐 빌리면 된다. 세상 사람들이 그 이름이 소녀의 이름인지 아닌지 알 까닭이 없지 않은가? 장미 언니의 이름이 정말로 장미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혹시 의심하는 사람이 있어도, 세상에는 같은 이름의 사람이 많을 것이므로 자신이 남의 이름을 잠시 들먹인다고 해서 크게 잘못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할머니 손녀인 지은이의 이름을 둘러대었다. 소녀는 잠시 지은이 되었지만, 그 이름 역시 할머니의 손녀나 소녀만의 이름은 아니다. 세상에는 이름이 지은인 여자아이가 생각보다는 많은 것이므로.    

 

독자는 이쯤에서 작가가 소녀의 성장을 시간대별로 그리기보다는 자신이 설정한 단계별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야 한다. 그런 변화를 즐기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묘미 중의 하나이다. ‘이년’, ‘저년’이 ‘언나’, ‘간나’를 거쳐서 스스로 이름을 구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단계를 거친 만큼, 소녀도 성장해야 한다. 성장의 기준은 간단하다. 소녀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정도의 발전적 변화를 상상하면 된다. 진짜 엄마만을 생각하며 집을 나온 소녀가 처음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집에서는 그저 버려진 존재에 불과했고, 자신의 순수 의지로 이룰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황금다방 단계에서의 소녀의 성장은 찬수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려지고 있다. 소녀 자신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찬수에 비해서 아는 것도 많고 좀 더 어른에 가깝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런 과정에서 작가는 소녀의 입을 통해서 원색적인 단어를 과감하게 토해내고 있다. 그러다 보면 소녀는 조금이라도 더 어른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을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작가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한다거나 말싸움에서 지면 울음을 터트리는 찬수의 모습을 상대적으로 어린아이처럼 그림으로써 가짜 부모 이외의 사람에게 처음으로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법을 배운다. 소녀의 입에 젤리를 먹여주고 곰보빵을 넣어주던 찬수의 손이, 나중에는 찬수의 혀가 소녀의 입안을 들락거리도록 은밀하게 유혹하는 맹랑함까지 보여준다. 그렇게 소녀는 아주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목소리라는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소녀는 타인에게 보이는 자기 내면의 모습을 순수한 자기 의지에 따라 통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서 황금다방의 찬수에게 잠시 보여주었던, 그리고 태백식당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던 어설픈 지식을 이용한 생존방식의 습득 과정이 좀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란 참 쉽다. (142쪽) 내가 그것을 외우는 것과 그것을 내 마음에 담는 것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십계명을 외우는 것을 보고 목소리는 너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했지만, 나는 하나님의 자녀 따윈 되고 싶지 않았다. (142쪽) 이제 소녀는 자기가 해야 하는 행위의 기준을 스스로 정할 줄 알게 된다. 즉,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 목소리는 끊임없이 소녀를 종교적 신념으로 이끌고자 하지만, 소녀는 그 와중에도 자신이 갈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 그만큼 소녀는 성장하고 있었다.  

    

으슥하고 한적한 철거 예정인 집들이 즐비한 골목 안 어느 폐가에서 생활하는 남자와의 만남에서 소녀는 처음으로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 주도적,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연이야 모르겠지만 거의 은둔형 외톨이 수준의 남자 방에서 소녀는 색다른 성장을 겪는다. 제한된 공간이지만, 소녀는 많은 책을 통하여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책 속의 사람들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녀와 남자가 살고 있는 폐가는 외부와는 완전히 격리된 공간이다. 심지어 벽 너머로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술도 마시고 본드 냄새를 들이 맡거나, 간혹 남녀가 몰래 들어와서 섹스하기도 한다. 그런 소리는 고스란히 남자와 소녀에게 전해지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들만의 공간은 유지되고 있다. 작가는 이즈음에 와서 소녀가 자신을 둘러싼 외로움과 고독에서 스스로 일어서서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격리된 골목 안의 폐가와 세상을 등지다시피 한 외톨이 남자가 바로 그 환경이다. 작가는 소녀가 자신의 의지로 그 환경을 벗어나게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소녀는 오히려 그 안에 안주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소녀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소녀를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지도 않고, 가끔 소녀가 책을 읽다가 잠들면 이불도 덮어준다. 소녀는 이불깃을 여며주는 남자의 고요한 손길을 좋아했다. 간혹 벽 너머에서 섹스하는 남녀의 소리가 들릴 때면 자위하고 싶어 하는 남자의 자지를 소녀가 대신 손으로 흔들어 주기도 한다. 찬수 앞에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랑스럽게 입에 올리던 남녀의 섹스에 비해서, 남자의 자지를 흔들어 주는 행위는 그저 듣고 보기만 했던 행위보다 소녀가 한층 더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남자는 소녀에게 인위적으로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소녀도 남자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둘이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메워주고 있다.  

       

스스로 밖으로 나오지 않는 소녀를 작가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밖으로 나오게 한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소녀가 진짜 엄마를 찾아가는 과정의 의미를 상실하고 남자와 함께 그 환경에 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남자가 소녀를 납치 감금하고 성폭행했으리라는 자기들만의 시선으로, 남자를 범죄자로 취급한다. 소녀는 정말 세상이 싫어졌다, 그저 남자와 함께 폐가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하다가도 다시 남자에게로 돌아가려 하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소녀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 경찰은 괜찮으니 있는 그대로 말하라고 했다. 옷을 벗겼어? 니가 싫다고 했는데도 너를 막 괴롭혔지? 어떻게 괴롭혔어? (168쪽) 그렇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소녀에게 계속 물어볼 작정이었다. 왜, 아무리 어린 소녀라도 남녀가 한 장소에 있으면 자발적 섹스든, 성폭행이든 가릴 것 없이 섹스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상상하는지 모른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도 그래서 생긴 것 같았다. 소녀가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을 거면서 묻기는 왜 묻는지 모른다. 소녀를 괴롭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라는 사실을 그들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작가는 그렇게 해서라도 소녀가 잠시 머물던 곳에서 나와 다시 진짜 엄마를 찾는 여정을 계속하게 만들고 싶었다. 소녀는 등을 떠밀려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간다.  


        

5. 꼬마를 바라보는 애틋함 

     

이제 소녀는 적극적이다. 유랑 각설이 패거리에 스스로 잠입한다. 거기에서 소녀는 자기처럼 엄마 찾아 떠도는 대장을 만난다. 육체적으로는 다 성장한 대장도 정신적으로는 소녀와 다를 바 없다. 이즈음에 소녀가 느끼는 것은 바로 성장이라는 관념의 변화다. 기껏 열한 살 정도의 소녀나 대장이나 미남이 이모 모두 이제 어른이 된다. 아니, 어쩌면 소녀가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장이 어린아이로 성장을 멈춘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그렇다. 작가는 소녀가 성장하는 모습을 여전히 주변 인물과의 관계 설정에 변화를 주는 방법으로 그리고 있다. 소녀가 패거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찾는다. 이제 자신도 한 무리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스스로 익혀가고 있다. 물론 그들은 소녀를 ‘꼬마’로 치부하면서 자신들이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본다. 소녀는 아무래도 좋았다. 구성진 노래도 이미 어른 뺨치게 구경꾼의 가슴을 쥐락펴락할 줄도 알게 되었고, 무리 안에서 확고한 자신의 위치를 다져간다.  

   

패거리 중에서 유일하게 가족이 있는 달수가 딸 미정에게 보내는 그리움과 깊은 애정이 소녀에게는 전혀 생소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소녀는 원래 가짜 부모와 살았던 시기와 황금다방에서 지낸 시기, 그리고 태백식당 할머니와 지내던 시기에도 진짜 가족이라는 생각을 품어본 적이 없으니, 달수의 그런 감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야 내 자식이니까. 가족은 원래 그런 거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잊을 수 없지. (188쪽) 가족을 위해서 돈 벌러 타지를 떠도는 아빠인 달수는 십 년이 지나도 얼굴을 볼 수 없던 딸에게 어떤 존재일까? 과연 딸은 달수를 보고 싶어 하기나 할까? 이래저래 소녀에게는 가족이라는 관념에 혼란함만 더해 간다. 그래도 작가는 각기 다른 성격의 네 인물(대장, 미남, 달수, 용이)을 통해서 소녀에게 어른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조심스럽게 언질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작가가 처음부터 일관적으로 견지해 오던 방법대로 남녀 간의 성행위, 혹은 성적인 성숙 과정을 통해서 차분하게 그리고 있다.

      

트럭은 각설이 패거리에게 집이다. 화물칸과 운전석은 서로 다른 방과 같은 공간이며, 대장과 미남이 섹스하는 날은 달수와 운전석이라는 다른 방으로 피해 있어야 한다. 숨 쉬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옆방에서 대장과 미남은 섹스를 즐기고, 운전석에서 그 소리를 듣는 소녀에게 무안해진 달수는 슬며시 소녀를 껴안은 손을 푼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소녀도 알건 다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남녀 간의 이야기는 얽히고설킨다. 공개적으로 연인 사이인 대장과 미남, 그리고 대장은 눈치채지 못한 은밀한 남녀 사이인 용이 삼촌과 미남,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달수, 그리고 이제 막 생리를 시작한 소녀까지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고, 작가는 그 안에서도 소녀가 성장해 가야 하는 방향을 정확하게 설정하고 있다. 찬수에게는 남녀 간의 섹스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읊어대던 소녀였지만, 실상은 생리가 시작했어도 여자아이의 성적 성숙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무지한 어린 여자아이일 뿐이다. 아무튼 이제 아무 남자랑 같이 있으면 안 돼. 아무 남자? 그러니까 남자를 조심해야 한단 말이야. 어떻게 조심해? 아무 남자랑 막 자면 안 된다고. (‘아무’ 남자랑 ‘막’ 자는 게 도대체 뭐야?) 그럼 애가 생겨? 그래 이제 애를 가질 수 있다고. 애는 보지에 자지를 넣어야 생기는 거야. 그냥 막 잔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옆에서 듣고 있던 대장이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224쪽) 자기도 애를 가질 수 있다는 말에 소녀는 엄마 뱃속에 살던 시절을 떠올려 본다. 소녀는 평화롭던 그때를 다 기억하고 있었고,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패거리와의 생활에서 작가는 소녀를 어느 정도 성장시킨 후에 다시 그곳을 떠나게 한다. 폐가의 남자와 지내다가 세상 사람들 시야에 들어왔을 때처럼 어쩌면 다시 세상 사람들이 대장과 달수와 함께 다니는 소녀에게 혹시 납치당한 것은 아니냐고 추궁할 것이라는 상황을 만들어 소녀를 트럭, 집에서 나와 또 다른 세상으로 떠나게 만든다. 소녀는 이미 자기 손을 잡고 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달수의 손에서 본능적으로 자기를 버리려는 손인지, 지켜주려는 손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이 또 자기를 버리려 한다고 생각한 소녀는 떠나기를 거부하지만, 지금까지 자기를 버렸던 손길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자기를 지켜주기 위한 손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그들을 떠나기로 한다. 소녀는 달수가 주머니에 넣어준 몇 푼의 돈과 생리대 그리고 초코파이 봉투만 들고, 버스에 오른다. 누구에게도 잡혀가면 안돼. 알아들어? 나쁜 아저씨들이 너를 잡아갈지도 몰라. 잡아서 나쁜 일을 시킬지도 몰라. (233쪽) 달수는 소녀에게 당부한다. 이제 소녀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좀 더 어린 여자아이에게는 험난한 세상에 내던져진 상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게 소녀는 한층 성장해서 각설이 패거리를 떠난다.  


        

6. 유나에 담긴 성장통  

   

이쯤에서 소녀는 작가가 만들어 가는 성장통에 잠시 의혹을 심는다. 집을 나와서 떠돌게 된 근본적인 이유인 진짜 엄마 찾기에 대하여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반전이자 성장이다. 이 세상 모든 가짜를 다 찾아서 태워버리는 한이 있어도 진짜 엄마를 찾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것 같았던 소녀는 실체도 모르는 진짜 엄마를 찾는 행위가 과연 진정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의심스럽기만 했다.   

   

태백식당 할머니에서 양육의 책임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잠깐 발을 들여놓았던 작가는 이번에도 가출 청소년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아주 자연스럽게 발을 담근다. 소녀는 거리에서 가출 청소년 유미와 나리를 만나고, 유나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유미와 나리라는 이름에서 한 자씩 빌려서 지은 이름이다. 소녀는 이처럼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랜만에 상호를 비롯한 동년배 남자아이들도 등장시킨다. 가출 청소년의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장치이다. 대부분 가정에 문제가 있거나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이 집이나 주거지를 나와서 끼리끼리 어울리며 살아가는 가출팸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안에서 다시 성장을 계속해야만 하는 소녀의 모습도 그리고 싶었나 보다. 그런 소녀의 성장은 처음부터 말했듯이 성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통하여 그려진다. 생리를 시작한 소녀는 자의적 결정에 따라 섹스를 경험한다. 그렇게 입으로만 떠들던 보지에 자지를 넣는 행위를 자기 스스로 시작하고, 그런 행위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쯤에서 작가의 그런 설정이 과연 의미 있는 전개였는가 하는 점은 생각해 볼 문제였다. 앞에서 사회적 부양책임에 대하여 할애한 지면에 비해서 지나치게 늘어지는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출 청소년들과의 동거 과정에 대해서는 사실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함께 어울리고, 담배도 배우고, 오토바이를 타고, 남자와 섹스하고 이 모든 모습은 설명이 없어도 짐작이 가능한 일들이었다. 물론 그마저 가출 청소년에 대해 갖게 되는 좋지 않은 선입견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읽다 보면 작가가 독자의 먹먹한 감정을 약간은 지나치게 오래 붙잡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소녀가 겪고 있는 성장의 완성은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리의 새아빠에게 칼을 휘두르는 전개는 소설의 시작부터 이어 온 서사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나에게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갖게 했다. 나리의 새아빠는 세상의 모든 가짜 아빠이자 절대 악의 표본일 수 있었고, 소녀의 처지에서는 그런 가짜를 태워버리는 과정도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색했다. 항상 진짜 엄마의 자궁 속 평화를 그리워했고 언젠가는 그것으로 돌아가 보고 싶어 했던 소녀가 자기의 자궁 속에 또 다른 ‘평화’를 심는 과정이면 충분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내 구멍으로 들어가고 싶다. 들어가서 세상 밖으론 두 번 다시 눈을 돌리고 싶지 않다. (282쪽) 소녀가 처음부터 찾아 헤매던 진짜 엄마는 소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안의 평화는 자기가 품은 또 다른 소녀일지도 모른다. 긴 호흡 끝에 벌어지는 이런 전개는 정말 색다르고 참신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소녀는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난 어린애에서 바로 노인이 된 것만 같아. (300쪽) 제각각의 이유로 집을 나온 아이들 속에서 나는 자주 토하고 밥을 못 먹었다. 나를 유심히 보던 수진 씨가 하얀 플라스틱을 주며 오줌을 묻혀 오라고 했다. 그러곤 함께 병원에 가자고 했다.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었고, 보호소에 오기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도 물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299쪽) 소녀는 비로소 자신은 이제 엄마의 자궁 속 평화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다. 동시에 자기 안에 또 다른 평화를 간직할 준비도 끝났다. 작가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해도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7. 그리고...     


간혹 사람은 각자만의 이유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경우가 있다. 소녀가 진짜 엄마를 찾고 싶어 하고, 엄마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서 벗어나고 싶은 상황을 표현한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떠오를 수도 있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솟아날 수도 있다. 하지만 소녀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듯이, 작가도 소녀와 같은 시기를 겪었고 자기가 헤쳐 나가고 싶은 마음을 소녀에게 담았으리라고 쉽게 상상하게 한다. 이런 소설을 자전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소녀로 대변되는 가상의 모습에 몰두하다 보면 그 안에서 작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작가는 기가 막히도록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자기가 소설 속에 담고 싶은 이야기를 심는 재주를 지녔다. 그런 면에서 최진영 작가의 이 소설은 나무랄 데 없는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성장 소설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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