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전에 사 놓고도 읽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에야 읽었다.
이반 일리치는 과연 누구의 삶을 살아온 것일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촉망받는 둘째 아들인 이반 일리치가 성장해서 사회생활을 하다가 원인 모를(물론 소설 초반, 사다리에서 떨어지면서 옆구리가 다친다는 대목은 있었지만) 증상으로 일상의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원치 않던 투병 생활로 접어든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반 일리치 내면의 고통과 그런 이반 일리치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그 어떤 문학적 수사도 동원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나간 소설이다. 삶과 죽음의 참된 의미를 예리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내면의 심리를 파헤친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거창한 기존의 평가를 마음에 둔 시선으로 이 소설을 접하지 않았기에, 순전히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해 소설을 앉은자리에서 두 번 반복하여 읽어 보았다.
나만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반 일리치의 삶을 통하여, 소설이 쓰인 1886년 어느 한 가정의 아버지의 모습에서 왜 130년도 지난 요즈음 중산층 가정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는지 모른다. 소설을 읽는 사람마다 느끼는 관점은 다르겠지만, 나에게 다가온 이반 일리치는 바로 우리 세대의 아버지, 혹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다. 물론 톨스토이가 나에게 그런 시각을 강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반 일리치의 모습은 가족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아니, 알면서도 적절한 치료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만성적인 투병 생활을 견뎌온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가족을 위해 조금 더 높은 연봉의 직장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직을 앞두고 새로 이사할 집의 인테리어를 손보다가 예상치 않은 작은 사고로 옆구리를 다친다. 이반 일리치의 건강이 악화하는 과정에서 그의 건강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하는 주변인은 거의 없다. 흔히 아버지를 가족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현금인출기 정도로 간주한다는 요즘의 사고가 이미 한참 전부터 있어 왔다는 명백한 진실이 왜 소설 속에서 나의 눈에 띄었는지 모른다. 이반 일리치가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의사의 도움을 아예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운명이 달린 진료와 치료 과정도 의사에게는 그저 자신의 의학적 지식에 대한 과시, 혹은 확신의 검증 시도 과정이었을 뿐이다. 요즘의 일부 의사가 보여주는 의학적 지식에 대한 권위적이고 확정적인 진단과 행여라도 오진이라고 판명되었을 경우의 자기 회피적 탈출구를 은연중에 심어 두려는 시도는 어쩌면 그렇게 시대를 거슬러 똑같은 양상을 보여주는지 감탄할 정도였다.
다친 부위의 통증이 심해질수록 점점 죽음에 대한 예감에 직면한 이반 일리치는 그제야 지난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과연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과연 자신은 잘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유쾌하게 사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간주하면서 그는 유쾌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머릿속에서 꼽아본다. 그런데 기함할 노릇은, 유쾌하다고 생각했던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 이제 와서 돌아보니 전혀 다르게 여겨졌다.
"결혼이란? 무심코 한 결혼은 환멸과 아내의 입 냄새, 관능과 가식뿐이었다! 저 죽음 같은 업무와 돈 걱정, 그렇게 일 년, 이 년, 또 십 년, 이십 년, 모든 것이 한결같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죽음 같았다. 산을 오른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꾸준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랬다. 사회 통념으로 보기에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정확히 그만큼 삶은 내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 준비 끝. 죽어라!" (89p)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접한 집무실의 직장 동료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자신들 사이에 어떤 변화(인사이동이나 승진 등)를 불러올 것인가에만 관심을 보였고, 그의 아내는 남편이 죽은 뒤 어떻게 국고에서 돈을 타낼 수 있느냐에 관심이 쏠렸다. 하긴 요즘 아버지들의 죽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너무 비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격하게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지극히 평범한 한 가장의 죽음을 통하여 그 시대 가장에게 삶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동시에 죽음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인간의 고뇌와 절망감, 회한 등을 그의 시선에서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톨스토이의 사상과 철학이 이 소설을 읽는 많은 독자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게 되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말할 나위 없는 역작인 셈이다. 아마 현대의 시각과 감성으로 그린다 해도 더 이상 예리하게 그려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말이다.
"‘그렇다, 나는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저들은 괴로워하겠지만 그래도 한결 좋아지리라.’ 그는 이 말을 전하고 싶었으나 내뱉을 힘이 없었다. ‘하긴 굳이 뭐 하러 말해, 행동으로 보이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102p)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느꼈던 감정도 최후에 가서는 죽음 뒤에 남을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바뀐다. 살아오는 동안 갖고 있었던 안타까움도 이미 다 떠나보냈다. 이런 것이 죽음 뒤에 가족을 남기는 가장의 마음일까? 간혹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마음을 강압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순수한 자의에 의한 마음은 아닐 것이라고 속없이 빈정대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진심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신들의 가장이 임종을 앞두고 하는 말에 의구심을 가질 가족이 과연 있을까? 물론 소설에서 노골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은 체념(아쉬움이나 회한을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지도 모른다. 이반 일리치도 그런 마음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고전을 접한다는 면에서 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이 소설을 지루한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부분 고전이라 불릴만한 소설에 이유 없는 막연한 거부감이 드는 것은 단지 소설의 전면에 드러나는 문체일 뿐이다. 그런 시각적 불편함을 넘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철학, 시선 등을 읽는 사람의 시각에서 발견했을 때, 비로소 고전을 읽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아버지가, 또는 많은 아내와 자녀들, 아니 그냥 모든 사람이 한 번쯤 읽어 보면 좋을 것 같은 소설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