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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류

우리집은 안전할 줄 알았지.

by 정이흔


“아, 정말 무슨 비가 10월에도 저렇게 내리는지 모르겠네.”

거실 소파에 앉아 TV 화면을 보고 있던 진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늦여름도 다 지난 10월 초순의 날씨답지 않게 밖에는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고, TV 화면 속에서는 여러 곳의 침수 장면을 내보내고 있었다. 대부분 침수가 일어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지역에서 예상치 못한 침수가 발생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기예보에서 올해 여름에 비가 많이 올 것이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늦은 여름도 지나 가을까지 여름 장마 이상으로 비가 내릴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내리는 빗줄기를 마냥 탓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이 모든 현상이 결국 지구 기후 환경의 변화가 초래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마 앞으로는 단시간에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폭우는 여름이 아닌 다른 계절에도 얼마든지 내릴지 모르는 일이며, 어쩌면 ‘여름 장마’라는 말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TV 화면에는 강남역 사거리 한가운데에 고립된 승용차 위에 올라앉아서 태연스럽게 휴대전화로 어디론가 통화를 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와 통화하는 걸까? 가족일까? 아니면 보험회사에 전화하는 걸까? 하긴 그렇다고 이 난리 통에 출동할 견인차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채널을 돌려도 마찬가지로 온통 여기저기 폭우 현황에 대한 속보뿐이었다.

“그런데 난 이해가 안 가. 아무리 비가 많이 온다고 해도 저 정도로 빗물이 하수관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야. 뭔가 처음부터 공사가 잘못된 거 아닐까?”

옆에서 말없이 함께 TV를 보고 있던 지연이 한마디 던졌다.

“그건 아니고 아마 빗물 배수 설계 당시에는 예측하지도 못했을 정도로 비가 와서 그렇겠지. 하수관은 작고 밀려드는 빗물은 채 빠져나가지 못해서 차오르는 거니까.”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저렇게 순식간에 도로가 침수된다는 것이 말이 돼?”

“그런 걸 보고 역류라고 하는 거야. 하수구에 유입되는 빗물이 하수관 끝으로 방출되는 수량보다 더 많으면 하수구로 채 빠져나가지 못한 빗물이 마치 하수구가 토해내듯 거꾸로 도로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역류라고 한다고. 심하면 맨홀 뚜껑도 밀어 올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 위를 지나던 사람이 맨홀 속으로 빠지는 일도 있다잖아.”

“그런 일도 있었어?”

“그럼. 뉴스에도 나왔었잖아. 그건 그렇고 이번 비는 언제까지 내린대? 내일도 비가 오려나? 인제 그만 좀 왔으면 좋겠는데.”

“모르지. 지금 같아서는 저녁 늦게는 그칠 것도 같다고 하던데. 그것도 봐야 아는 거지만. 왜? 내일 출근이 걱정되어서 그래? 그냥 내일도 차 끌고 가지 마. 그러면 되지.”

사람은 참 이기적인 존재이다. 편하게 집안에 앉아 TV 화면으로 바깥 상황을 전해 듣다 보니, 침수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진수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차가 침수 피해를 당한 것도 아니고 집이야 물론 빗물에 잠길만한 저지대 단층 주택이 아닌 고층 아파트였으므로 TV 화면에서 보는 것 같은 그런 피해는 겪지 않을 것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밖의 침수 현황들은 지금 이 시기의 우리나라가 아닌, 마치 여름이면 반복해서 강한 태풍과 폭우로 침수 피해를 겪는 동남아의 어느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때 거실 벽의 스피커에서 관리소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진수와 지연의 귓전을 긁었다.

“아! 아! 관리사무실에서 알려드립니다. 지금 폭우로 인해 갑자기 불어난 경인로의 빗물이 주택가로 밀려들면서 우리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도 빗물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신 입주자 여러분께서는 지금 속히 차량을 지상으로 이동 대피시키시기를 바랍니다.”

방송을 듣자마자 현관을 열고 나와서 이미 운행이 정지된 엘리베이터를 뒤로 하고 계단을 날 듯이 달려 내려와 지하 주차장 입구에 도착하자, 무릎 위까지 들어찬 빗물에 잠겨있는 자신의 차가 진수의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은 영락없이 조금 전까지도 TV에서 본, 강남역 사거리에 침수되어 있던 바로 그 차량의 모습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미 절반 정도 물에 잠긴 차를 보며 진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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