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을 하다가 시간이 나면 종종 아내와 문학관을 찾는다. 물론 하는 일 자체가 운수업이므로, 비교적 시간에 자유스러운 근무 여건도 내가 문학관을 찾는 데 일조하고 있다. 처음에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문학관부터 시작했는데, 지금은 아예 1박 2일, 혹은 2박 3일의 일정으로 집에서 먼 곳의 문학관까지 다니고 있다. 그렇게 문학관을 찾기 시작한 지는 햇수로 이 년이 넘었고, 다녀온 문학관의 숫자로는 마흔 곳이 넘었다. 비록 다닌 기간이 오래되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흔 곳이면 적지 않은 숫자라고 할 수 있다.
문학관을 다니기 시작한 계기는 단순했다. 나이 60이 넘을 때까지 일에만 파묻혀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글이 쓰고 싶어졌다. 글이라고 해야 뭐 대단한 글은 아니지만, 일상을 담은 시나 수필, 짧은 소설 같은 글에 마음이 끌렸다. 그때를 시작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써서 노트북 창작 폴더에 보관하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문예 창작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었기에, 내가 쓴 글은 누구에게도 보일만한 글이 되지 못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문예지에 글을 응모해 보거나 당선 가능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공모전에 응모하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계속 낙선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갑갑한 습작 생활을 이어가던 도중에 우연히 문학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처음 찾은 문학관은 광명시에 있는 기형도 시인의 문학관이었다. 아내와 장을 보러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들렀는데, 문학관에서 접한 기형도 시인의 시에서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젖힐 수 있었다. ‘아, 문학관을 찾는다는 것은 이런 느낌을 얻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에 그날 집에 돌아와서 곧바로 인터넷으로 문학관을 검색했다. 생각보다 문학관은 많았다. 우리 세대가 학교에서 교과서로 만났던, 일제 강점기를 전후로 활동했던 많은 시인과 소설가를 기리는 문학관이 전국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어림잡아 육칠십 곳은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문학관 생각을 하다 보니, 문학관을 많이 다니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필력도 올라갈 것만 같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학관을 찾는 것만으로 내 글의 수준이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노력해야 하겠지.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남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쓸 날이 있을 거야.’라는 마음만 있었다.
문학관은 우리가 문인과 그들의 문학 세계를 접하는 가장 손쉬운 매개체이다. 물론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활용하면 그들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더욱 빠르게 접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문학관을 다닐수록 그런 방법으로 접한 정보와는 다른 문인의 세계에 빠져드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 기형도 시인의 문학관을 찾았을 때의 기억이다. 시인은 나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사람이다. 그것도 신촌 로터리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시인은 채 삼십 년의 수명도 누리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신춘문예 수상작 ‘안개’의 배경이 된 소하리 천변 방죽 근방은 나도 곧잘 놀러 다니던 곳이다. 문학관에서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나도 그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누구나 가난했던 시절, 그 시절의 기억을 오롯이 떠올리며 써 내려간 시인의 시에서 느낀 것은 공감이었다. 누구는 아무 생각도 없이 보낸 날들의 기억을 소재 삼아 시인은 그렇게 가슴 절절한 시를 썼다는 사실이 내가 왜 지금까지 시 한 편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고민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는 그 자체가 바로 생활이었다. 생활이면서도 어쩌면 시가 시인의 눈으로 본 세상을 글이라는 화구(畫具)를 이용하여 그린 그림일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그렇게 느끼다 보니, 그저 그럴듯한 시어 몇 개를 나열하는 거품 낀 사이비 문인의 자기도취적 자세로는 단연코 제대로 된 시를 쓸 수 없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집에 오자마자 시인의 시집을 주문했다. 그리고 책이 도착하자 단번에 다 읽었다. 물론 문학관에서 시인의 모습을 보기 전에도 시인의 시를 읽을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 그때는 시를 마음으로 읽지 못하고 그저 눈으로만 읽었을 것이 분명하다. 기형도문학관을 다녀온 이후, 나는 문학관을 찾는 행위에 나만의 확고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문학관은 생각보다 우리 주위에 가까이 있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서 다녀올 수 있다. 물론 문학관을 찾는다고 해서 사전에 거창한 준비를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아무 때나 떠날 수 있는 마음가짐이면 준비로는 충분하다. 요즘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러 카페에 곧잘 다닌다.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카페를 찾기도 한다. 한창 교외의 넓은 대지에 세워진 대형 베이커리 카페를 찾는 일이 유행인 적도 있었다. 인터넷에서도 카페 방문기가 블로그마다 넘쳐흐르던 때가 있었고, 나도 빵을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 그런 카페를 즐겨 방문하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문학관을 찾고 나서부터는 그 취미를 버렸다. 문학관에 가서도 커피나 차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문학관 주위의 카페가 아닌, 문학관 사무실에서 마시는 차 맛도 나름 일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을 들을 때도 있지만, 아내와 함께 조용히 관람하고 돌아올 때도 많았다. 문학관을 찾다 보면 덤으로 얻는 것도 많다. 김달진문학관에서는 바로 앞에 있는 시인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차를 한잔 마시기도 했고, 오영수문학관에서는 방문 기념으로 귀중한 책 세 권을 받기도 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작은 학교에서는 거센 빗줄기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우중(雨中) 강연도 들었으며, 박인환문학관에서는 때마침 열렸던 백일장에 참여한 자작시로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윤동주문학관에서는 근처의 세검정으로 사생을 다녔던 고등학교 미술반 시절의 추억을 덤으로 되새길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문학관을 찾아다녔다.
문학관을 찾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의 발로이어야 하고, 문학관에서 무엇인가 꼭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버려야 한다. 그런 목적의식은 문학관을 찾는 마음에 부담만 잔뜩 얹어줄 뿐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냥 가벼운 나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낫다. 아내나 가족과도 함께 나설 수 있어야 한다. 주위를 보면 나이 든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진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그렇지 않다. 기회만 있으면 서로를 불러댄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함께 해나간다. 그런 까닭에 글을 쓰지도 않는 아내가 나의 문학관 나들이에 동참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이가 들수록 배우자와 함께 즐기는 취미가 있다면, 그 가정은 평온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문학관 나들이는 진지하게 추천할 만한 취미라고 나는 단언한다.
문학은 아마도 선사 이전부터 인간의 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하나의 생활양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만의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지금도 일상이 문학이고, 문학이 일상인 세상을 살고 있다. 문학은 아무리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 읊더라도, 어딘가 모르게 그럴듯해 보이는 법이다. 하물며 문학관을 찾아다니며 가슴속에 차곡차곡 쟁여둔 문학적 감성을 지닌 사람이 읊는 경우라면, 더욱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요즘 같은 시절에는 가까운 문학관부터 한 번 돌아보는 취미도 가져봄 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