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서랍을 열었다가 문학관 이야기 중 발행하지 않은 글이 있는 것을 발견했기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일단 발행한다. 문학관 이야기는 투고해 봐도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으니 아무래도 그냥 노트북 한 구석에 조용히 묻힐 운명인 듯하다. POD출간은 사진 편집 때문에 내 실력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기에 하지 않기로 했다. 간직하다 보면 언젠가는 뜻밖의 기회에 다시 빛을 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만 간직하기로 했다.
박경리문학관을 출발한 우리는 섬진강을 끼고 하동포구를 향해 달리다 섬진강 대교를 건너 광양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지난번 김용택의 작은 학교를 찾았을 때 쏟아지는 빗줄기를 연신 허공으로 뱉어내던 그 섬진강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강물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우리도 강물의 흐름에 맞춰 느긋하게 차를 몰았다. 잠시 후면 마흔네 번째 문학관이다.
뜨거운 여름 햇빛 한 점 피할 곳 없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라본 문학관의 위용은 지금껏 다닌 문학관 중에서 역대급 규모였다. 건물 외관에 특이하게 뾰족한 첨탑처럼 보이는 부분은 아마도 태백산맥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확실히 문학관의 특성이 잘 표현된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건축가 김원 님이 말하는 설계 의도와는 다른 평가일지 모르지만, 아무튼 내 눈에는 그렇게 비췄다. 마치 문학이 작가의 창작 의도와는 다르게 독자만의 시선으로도 전혀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백산맥문학관은 그렇게 내 눈앞에 다가왔다.
문학관 입구를 들어서면서 문학관 내부의 전시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조정래라는 작가로부터 받은 느낌을 먼저 정리해 보고 싶었다. 여러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나는 한마디로 ‘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말장난처럼 들릴지라도 나는 이보다 더 조정래 작가에게 어울리는 표현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부연하자면, 나의 말뜻은 다음과 같다.
시를 쓰거나 수필을 쓰거나 소설을 창작하는 문인들은 각자 자신의 분야에 걸맞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들의 문학성을 칭송한다. 이상을 천재 시인이라 일컫고 오장환을 시단의 새로운 왕이라 칭하는 등의 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부분에 특별난 문인이라고 해서 다른 부문까지 재능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물론 소설가 황순원이나 박범신은 소설가로 이름을 날린 후에 시를 쓰면서 시와 소설의 겸업 문인 대열에 들어서지만, 반대로 시를 그렇게 쓰고 싶었어도 운문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는 스승 박목월의 한마디에 시인의 꿈을 접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대하소설 ‘객주’를 집필하면서 ‘길 위의 작가’로 불린 김주영 같은 문인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조정래라는 작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 위함이다.
문인이 작품을 창작하는 동안 겪는 고뇌는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고통이다. 소설가는 남의 잉크병의 잉크를 찍어쓰는 사람이 아니라 내 몸속의 피를 찍어 내 목소리를 낭자하게 남겨두려는 사람이라는 김홍신의 말처럼, 글의 길고 짧음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아마도 시보다는 소설을 쓰는 일이 더 그럴 것이다. 소설 중에도 단행본 10권 정도 분량의 대하소설을 집필하는 작가에게는 더욱 고통일 것이다. 내가 다녀온 문학관의 문인만 해도 ‘대발해’의 김홍신이나 ‘객주’의 김주영, ‘혼불’의 최명희와 ‘토지’의 박경리가 그렇다. 그리고 그중 가장 두드러진 작가인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집필한 조정래도 그렇다. 아리랑문학관에서도 보았지만, 소설을 구상하기 위한 조정래의 자료 취재 여정은 정말 험난한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집요함은 태백산맥의 집필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어렸을 적 흔히 보았던 일수도장을 찍던 작은 수첩, 함바집에서 거래처별로 밥값을 기록하던 바로 그 작은 수첩이 조정래의 취재 노트였다. 지금의 내 나이로는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끼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필체로 채워 나간 바로 그 취재 수첩이 조정래의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전시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요즘은 문학 작품의 분량이 점점 짧아지는 추세이다. 10권은 고사하고 단행본 1권 분량의 장편소설도 예전에는 원고지 1,000매가 훌쩍 넘는 분량이었지만, 요즘에는 800매 정도로 분량이 짧아지고 있다. 심지어 어떤 공모전을 보면 500매 정도 소설도 경장편이라고는 하지만 아무튼 장편의 범주에 넣고 있으니, 독자들에게 태백산맥과 같은 작품은 읽기에 부담이 가는 작품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태백산맥은 하나로 20만 번쯤 찍으면 닳아지는 인지 도장을 2009년 200쇄를 찍을 때까지 36개를 바꿀 정도로 출간 부수가 많았다. 지금처럼 짧은 분량의 글을 선호하는 시대에 상상할 수 없는 부수이다. 그러니 그런 작품을 집필한 조정래가 나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이겠는가? 분명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난 다른 존재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마 나에게 하늘의 별 이름을 짓는 권능이라도 있다면, 조정래는 문창성(文昌星) 아닌 문창성(文創星)의 화신(化身)이라고 주장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나와 함께 문학관을 돌아본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전시실에는 필사본 전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필사본의 규모도 상상을 초월한다. 간혹 다른 문학관에서도 필사본 전시실을 본 적이 있는데, 이곳의 규모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그만큼 독자들의 태백산맥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공간이었다. 필사본 전시실의 한가운데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는 언제든 누구든 필사본을 제공하면 그곳에 전시하겠다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이를 본 딸이 나에게 한마디 한다. “아빠도 한 번 필사해 보는 건 어때?” 나는 그냥 딸을 바라보며 웃고 말았다.
태백산맥이 민족 분단과 극심한 좌우익 이념대립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 까닭에 현대사 왜곡이라는 명분으로 고발도 당한다. 하지만 이런 작품 외적인 이야기는 솔직히 나에게 커다란 감흥을 주지 않았다. 애초 문학관 나들이를 힘겨운 삶에 지친 나에게 주는 작은 일탈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터라, 문학관을 찾는 과정과 그렇게 문학관을 돌아보며 작가의 인간적인 성품과 작품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기르는 것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저 작가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런 시각으로 관람하다 보니 아리랑문학관에서도 보았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조정래 작가가 일렬로 높이 쌓아 올린 작품의 육필 원고 옆에 손자와 함께 서서 웃고 있는 사진이다. 그 사진 하나로 작가의 가족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작품의 위대성만큼이나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그런 자료를 관람하러 문학관을 찾았다는 듯 말이다.
나오는 길에 잠시 시원한 음료를 한 잔 마시기 위해 주위의 카페를 검색하던 딸이 문학관에서 얼마 멀지 않은 장소를 찾았다. 간단하게 직접 구운 빵도 함께 판매하는 카페였는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음식은 청결과 정성의 예술”이라는 조정래 작가의 친필로 쓰인 글이 벽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작가가 가끔 들린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꼭 문학관만이 아닌, 이렇게 작가의 사소한 흔적까지 따라가는 재미도 문학관 나들이를 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인 것 같았다. 문득 문학관 건물 1층을 낙타 카페로 꾸민 정호승문학관 생각이 떠올랐다. 정호승 시인도 종종 그 카페를 들렀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는 카페를 나서서 다음 목적지를 향해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