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문학공원에서 차로 이십여 분 정도 달리니 박경리뮤지엄 안내판이 보였다. 박경리 선생에게는 생의 마지막 종착지였으며, 그곳에서 영면하셨다. 비스듬한 언덕길(하동 언덕길과는 차원이 다른)을 올라 나지막한 중턱에 현대식 건물(하동은 한옥이었다)의 본관이 보였다. 차를 세우려다 보니 눈앞이 계단이다. 아내 무릎에 경고가 울린다. 가만히 보니 차를 언덕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건물 현관에 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를 내려 주고 다시 내려와서 주차하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아내와 딸을 내려 주고 나는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차를 주차하고 올라가니 로비에 아내와 딸도 없고 매표소도 잠겨 있다. 이건 뭐 그냥 관람하라는 이야기인가? 자세히 보니 관람을 원하는 사람은 벨을 누르라고 적힌 메모가 걸려 있었다. 아, 그런데 관람료가 조금 비싸긴 하네. 보통 관람료를 받는 문학관도 65세 이상은 무료인데, 이곳은 성인 5,000원에 경로 할인을 해 봐야 4,000원이다. 아마 전국 문학관에서 낸 관람료 중에는 가장 비싼 관람료였을 것이다. 아무튼 아내와 딸과 함께 벨을 누르고 기다리니 2층에서 직원이 내려왔다.
매표소 안은 서적과 안경 닦이 등 간단한 물품의 판매도 겸하고 있었다. 딸에게는 필수품인 안경 닦이를 하나 골랐고, 나는 박경리의 중단편선집 ‘불신시대’를 한 권 골랐다. 미당시문학관에서 시집을 한 권 고른 이후 거의 한 달만이다. 물론 마음에 드는 서적이 있으면 인터넷으로 사도 되지만, 이렇게 문학관을 다니며 사는 일도 문학관을 찾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매표소에 연결된 전시실을 잠시 돌아보고 나오니 직원이 안내를 자처한다. 직원을 따라 본관 밖으로 나와서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하동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박경리 전신 동상을 보았다. 동산의 받침석에는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Dreamers Create”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과 하동 이외에 이와 똑같은 동상이 통영의 생가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고 했다.
이곳은 크게 본관과 본관에 연결된 문인의 창작 공간, 그리고 박경리 사저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저는 다시 필사 체험실과 실제 살고 계셨던 생활실 그리고 생전에 서가로 이용했던, 전시 공간과 인터뷰 영상을 상시로 재생해 놓은 영상 감상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는 지하공간으로 구분되어 보존되고 있었다. 이미 하동과 원주 시내의 옛집을 돌아보면서 박경리라는 작가에 대해 여러 가지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 그리고 삶에서 느낀 느낌 등을 정리하기는 했지만, 이곳은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사실 토지가 워낙 유명한 대작인지라 박경리 하면 토지를 떠올리지만, 실상은 시도 짓고 수필과 단편도 많이 남겼다. 단지 토지를 집필하면서부터는 오직 토지 집필에만 전념하였던 까닭에 다른 글들은 초기작으로만 남았을 뿐이다. 하긴 장장 이십오 년을 한 작품에만 매달렸으니, 탈고를 끝내고 원고지 끝에 쓴 “끝”이라는 한 글자의 무게가 어떠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아마도 그 “끝”이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을 상징하는 의미로도 다가올 법하다. 실제로 토지 집필 후에는 미완의 연재소설(나비야 청산 가자)을 제외하면 산문집을 몇 권 출간했지만, 제대로 소설집을 출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타계 이후 유고 시집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가 출간되었을 뿐이다.
필사 체험실에서는 최명희문학관에서처럼 몇 문장이라도 써보고 싶었으나 해설 일정에 쫓겨 그냥 나왔다. 체험실 뒤의 돌계단을 오르면 생활공간이었던 실내로 들어갈 수 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거대한 벽난로가 인상적이었다. 워낙 고양이를 좋아했던 까닭에 벽난로 실에서 테라스로 나가는 문 아래에 고양이 출입문을 따로 만들어 둔 점도 인상적이었다. 생각해 보건대 고양이는 원래부터 영물이라는데, 고양이들도 뭘 알고 박경리의 곁을 지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말하고 보니 조금은 억측인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박경리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킨 생명체가 고양이였을 것이라는 데에 자꾸만 내 생각이 머물렀다. 평소 사용하셨던 집필 탁자와 옥돌 보료, 심지어 옷장 안의 옷들도 그대로 있는데, 그 공간에서 사람만 소리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아니, 보이지는 않아도 항상 주위에서 그곳을 찾는 사람들 곁을 떠나지 않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옛집에서 보았던 외손주 김원보의 그림인 새장 안의 새 원본이 있었다. 박경리가 소중하게 여겨, 나중에 시집 ‘못 떠나는 배’의 표지로 사용되었다던 그 그림이다. 그림을 실물로 보니 박경리가 왜 그 그림에 애착을 느꼈는지 어슴푸레 알 것 같기도 했다. 탁자 위 달력은 박경리가 타계한 2008년 5월에서 멈춰있었다. 벌써 17년 전의 일인가?
작가의 집은 소설가로서의 박경리보다는 인간적인 어머니, 할머니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영상으로 보는 인터뷰 역시 박경리의 인간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글을 쓰기는 하지만 자연과 생명에 대한 집요하리만치 철저한 의식의 전개 과정도 보여주고 있다. 직접 쓰지는 않지만, 쓰는 후학을 지원하는 모습도 어찌 보면 어머니의 마음이다. “~숲속을 헤매다 돌아오는 그들 식사를 마치고 흩어지는 그들 누에꼬치 속으로 숨어들 듯 창작실 문 안으로 사라지는 그들 오묘한 생각 품은 듯 청결하고 젊은 매같이 고독해 보인다.”(산골 창작실의 예술가들 中에서)라는 글을 보면 박경리가 창작실 문인을 어떤 마음으로 지원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우습게도 나는 유치원 보모 같은 생각을 하고 모이 물어다 먹이는 어미 새 같은 착각을 한다.”에서 박경리가 느낀 것은 진정 착각이었을까? 분명히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며, 어미 새가 맞았을 것이다. 실제로 박경리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은 문인들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게 문학을 향한 열정과 가슴으로 낳은 수많은 박경리의 아이들이 토지 문화관 창작실을 거쳐 갔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로, 존경스럽다는 말로만 입에 올릴 문인은 단연코 아니다.
고추를 따고 말리는 영상에서 박경리가 한 말이 귀에 남는다. 절반은 버린다고 생각해야 한다. 갑자기 쓸데없는 상상이 떠올랐다.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없고, 그저 절반이라도 이룬다면 만족할 일이 바로 인생을 살아가는 일인가? 그런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문학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한들, 인생만 하랴? 인생만큼 거룩하고 절실한 것은 아니리라. 박경리는 힘든 시절 거부하고, 포기한 극한적 고독의 산물이 바로 ‘토지’라고 했다. 인생이 문학이었던 셈은 아닐까?
하동부터 이어서 박경리의 흔적을 따라 세 곳을 돌았다. 나와 아내와 딸이 느낀 것은 위대한 문인으로서의 박경리라는 존재의 일생이 아니라, 힘겹게 살아간 전후 세대 여성의 모습이었고 그 인생 속에서 피어난 결과물이 문학이었다는 사실이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왜 문학은 환경을 가려 가면서 꽃을 피우는가? 왜 죽을 만큼의 인생에 대한 대가로 문학이 주어지는가? 하는 질문의 해답은 아마 언제까지라도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박경리뮤지엄은 원주를 찾을 때 계획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이제 출발해도 집으로 가려면 교통이 혼잡한 시간 한가운데를 헤치고 하야만 한다. 그래서 생각한 곳이 지난번 백담사에서 내려오며 들렸던 한옥 화덕 피자집이었다. 그때는 아내와 둘만 갔다가 딸에게는 다 식은 피자를 사다 주었는데, 이번에는 딸에게도 막 구운 따끈한 피자를 먹이고 싶었다. 원주에서 팔당까지는 빗길에 한 시간 반이 걸린다. 피자를 먹고 나면 다시 한 시간 반을 달려야 집에 도착한다.
나는 아예 늦을 각오를 하고 빗길에 흐릿해진 시야를 밝히기 위해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안경을 꺼내 쓰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이제 정말 문학관 나들이가 마무리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