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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의 박경리 문학공원과 옛집

by 정이흔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내와 딸과 함께 원주에 다녀올 계획을 했는데, 비가 내린다. 지난주 하동 박경리문학관을 다녀온 후로 언젠가 원주 박경리 문학공원도 다녀오리라 마음을 먹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며칠 지나지 않아 원주에 갈 기회가 생겼다. 간간이 내리던 비는 원주에 도착하니 거의 걷혀 있었다. 마침 주차장에 자리가 있기에 차를 세우고 내렸는데, 먼저 내린 아내가 한마디 한다. “뭐야? 휴관인데?” 순간 지난번 나들이 때는 여섯 군데 모두 전화로 확인했는데, 이번에는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출발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에 갑자기 우울해졌다.



문학공원 내 문학의 집은 10월 말까지 리모델링 중이었기에 우리는 그 아래에 있는, 박경리가 토지 4, 5부를 집필하여 5부 전체를 완간한 공간인 옛집 방향으로 돌길을 따라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너른 정원과 마치 내가 어릴 적 흔히 보았던 외형의 2층 단독 주택 그리고 그 앞 너른 바위 위에 앉아서 멀리 치악산을 바라보는 박경리의 좌상이 우리를 반겼다. 박경리와 사진을 몇 장 찍고 주택 현관 쪽으로 발을 돌렸다. 문학의 집을 관람하지 못한 아쉬움에 주택 내부에라도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관람을 원하는 사람은 문을 두드리라는 표지에 노크를 몇 번 했는데도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가 다시 한번 두드리니 문이 열리며 안에서 해설사 한 분이 나오셨다. 알고 보니 내부가 좁아서 관람객 동선이 무질서하게 겹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30분 간격으로 해설사 두 분이 안내해 주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아직 이십 분 정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우리가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해설사는 그렇다면 잠시 밖에서 이야기하다가 시간이 되면 다른 사람들과 안으로 들어가서 해설을 이어가도 되겠냐고 하셨다. 우리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해설을 시작하신 해설사는 연고도 없는 원주에 박경리가 정착하게 된 계기부터 시작해서 원주에 박경리의 자취가 어떻게 남게 되었는지 전반에 걸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하긴 토지라는 작품이 워낙 방대한 내용의 대작이므로, 이런 나들이 소회를 풀어가면서 작품 이야기를 할 것은 못 된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다른 문학관에서도 비슷했지만, 특히 이번에는 철저하게 우리가 돌아본 장소와 사연에 대하여 느낀 점만 정리해 보기로 하였다.



박경리는 사위의 옥바라지 때문에 원주에 기거하던 딸과 외손주가 가여운 마음에 그들 곁에서 지내기 위하여 원주에 정착하였다. 딸이 옥바라지했던 사위는 ‘타는 목마름으로’와 ‘오적’의 시인 김지하이다. 갑자기 대학 시절의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를 외치며 신촌을 쏘아 다니던 그 시절도 이제는 잊힌 시절이었나 하는 생각에 잠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튼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박경리의 일생에 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냥 해설을 들으며 떠올린 생각만 몇 자 적어 보겠다.



엄청난 독서광이자 문학소녀였던 박금이의 인생도 순탄하지만 않았다. 김동리의 추천으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박경리(이때 김동리가 ‘경리’라는 필명을 지어 준다.)는 그때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어쩌면 바로 전에 다녀온 문학관의 최명희 작가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문학은 왜 꼭 그런 환경에서 꽃을 피우는가? 이것 또한 아마 영원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으로 남을 것이다. 친구의 소개로 보낸 박금이 자작시 몇 편을 읽은 김동리가 한 말, “자네는 글의 호흡이 긴 것을 보니 시보다는 소설을 쓰는 게 낫겠어.”, 이 말은 마치 박목월이 김주영 작가에게 했다는 말, “자네는 운문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아.”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게 한마디 말이 사람의 인생을 180도 바꿀 수 있다니…… 말을 한 사람도 그렇지만, 그 말을 듣고 자기가 진정으로 해나가야 할 일을 찾은 사람도 대단한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박경리의 손자 사랑은 유난했다. 남편을 잃고 어린 나이의 아들도 잃고 자기의 몸에서 난 혈육이라고는 오직 유일했던 딸이 낳은 손자였다. 문인들은 노년에 손자 사랑이 각별했다. 조정래도 그랬고, 서정주도 그랬다. 물론 박경리의 손자 사랑과는 차원이 달랐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수감생활을 하던 시절 그린 큰 손자 원보의 그림이 눈에 어른거렸다.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바로 김지하 시인이다. 박경리는 특히 이 그림을 소중하게 여겨서 나중에 발간한 책의 표지로도 사용하였다. 어린 감성에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니, 아마도 집안이 품고 있던 예술적 감각의 힘이었으리라.



사실 작가로서의 박경리는 나 같은 범인(凡人)이 입에 올릴 만큼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박경리는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 세상을 먼저 뜬 아들에 대한 사랑, 사무침은 평생 어머니 박경리의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가는 자기의 삶을 깎아 먹고사는 사람이다. 긴 세월 가슴속에 깊이 숨겨 두었던 자기의 이야기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박경리의 단편 소설인 ‘암흑시대’와 ‘불신시대’를 보면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수술받다가 제대로 수혈받지 못해 세상을 떠난 아들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자전적 소설이다. 박경리는 가슴속에서 지우지 못 한 회한을 글로 풀어쓴다. 그렇게 글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비로소 아들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달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박경리도 토지의 작가 이전에 한 어린아이의 어머니이지 않은가?



박경리는 소설 못지않게 그 당시로는 생소했던 환경, 생명 운동에 직접 앞장서서 실천한 환경주의자이다. 물론 자연을 훼손하지 말자거나, 환경 쓰레기의 무분별한 발생을 방치하지 말자거나 하는 추상적인 내용도 있었겠지만, 본인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직접 실천했고, 한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활동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환경, 생명 운동을 이어 나갔다. 원주에서는 실제로 박경리의 집을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집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사람은 자연을 팔아먹어가면 안 된다. 그저 자연의 원형은 훼손 없이 보존하고, 자연이 주는 부산물(이자)로만 먹고살아야 한다는 利資論을 보아도 박경리의 환경 생명 사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사실 박경리는 글을 써서 유명해졌다고 해서 그 유명세만큼 막대한 부를 축적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 재산을 후배 문인의 문학적 발전을 위해 희사했다는 사실은 그저 존경받을 만한 일이라는 단순한 말로만 치하할 일은 아니다. 누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박경리 문학공원에서 차로 이십 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박경리뮤지엄에는 후배 문인의 문학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창작촌 시설도 세워져 있다. 박경리는 이곳에서 타계하기 전까지 손수 키운 텃밭의 채소로 반찬거리도 만들어서 문인들의 식사상에도 올렸다. 그저 어머니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자식들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문득 창작실 입주 작가였던 소설가 박범신도 분명 그 정성 가득한 밥상을 받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뮤지엄에서 느낀 이야기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10월 말 문학의 집이 다시 개관하면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것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오늘 아예 박경리뮤지엄까지 돌아보고 나서는 나중에 다른 나들잇길에 원주 근처를 지나면 그때 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옛집에서의 해설이 끝날 즈음 밖에는 비가 억수로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비를 좋아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비조차도 우리(아내와 딸까지)에게 반가웠다고 말하는 박경리 선생의 손길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주차장에서 차를 빼서 박경리뮤지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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