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리 언덕 위 박경리문학관을 찾아

by 정이흔

혼불문학관을 나와서 우리는 성춘향의 고장 남원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계획대로라면 호텔 체크인을 하고 다시 나와 근처 적당한 식당을 찾아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일단 호텔에 짐을 풀고 나니 다시 나오기가 귀찮아졌다. 그렇다고 저녁을 굶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호텔로 음식을 주문해서 해결했다. 호텔 안의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서 맥주도 한잔 마시고 일찍 잠이 들었다.



남원에서 출발하여 구례를 거쳐, 그곳부터는 곧장 섬진강을 따라 하동으로 향했다. 박경리문학관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낮은 언덕길을 올라 거의 끝에 가서야 다다를 수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문학관으로 오르는 길에는 군데군데 공사 현장이 있었고 최참판댁 관람 매표소 앞에는 아예 차량의 출입을 통제하는 안내 입간판이 길을 막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입간판 너머에서 내려오는 차량이 눈에 띄었다. 나는 입간판을 한쪽으로 피해서 무작정 위로 차를 몰았다. 어차피 매표소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워보았자 무릎이 불편한 아내가 문학관까지 근 200여 미터가 넘는 언덕길을 올라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언덕길을 조금 더 올라가니 이번에는 아예 바리케이드처럼 길을 막은 공사 현장이 나타났다. 이제는 정말 문학관 관람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바리케이드 앞에 차를 세우고 핸드폰 지도를 열었다. 길을 확대해 보니 좁기는 해 보여도 옆길로 돌아서 올라가면 어찌어찌 문학관 근처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올라가 보자. 명색에 운전이 본업인데, 이 정도 골목길도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비좁은 골목을 헤치고 바리케이드를 우회했다. 내비게이션으로는 문학관이 불과 2~30미터 앞으로 보였다.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한 순간 좁은 길을 가로막은 공사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더 이상 올라갈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차를 돌려 내려갈 공간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길옆을 보니, 음식점 앞에 비좁기는 하지만 차를 돌릴만한 공간이 보였다. 무작정 남의 음식점 앞으로 차를 들이밀었다. 아내와 딸을 차에 남겨 두고 나 혼자 언덕을 올라갔다. 혹시라도 아내를 데리고 올라갈 만한 길인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언덕길은 길었고, 결국 아내는 데리고 올라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서야 나 혼자 문학관을 다녀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 길로 문학관까지 올라갔다.



문학관 앞에는 박경리 작가의 전신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평사리 너른 들판이 내려 보이는 곳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 스폿이 마련되어 있었다. 언덕 아래를 내려 보면서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나도 사실 올라오느라 숨이 아주 가빴는데, 아내와 딸은 차에 남겨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는 무슨 문학관을 이렇게 언덕 꼭대기에 세웠나 하는 불만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평사리 벌판을 바라보자니 왜 이곳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곳에 올라야 토지의 배경이 되는 평사리 전체를 품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과 국토의 혈맥인 섬진강을 정확히 양분하는 곳에 문학관이 위치한 셈이다. 비록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긴 했지만, 눈앞의 광경이 가쁜 숨을 순식간에 거두어 가기라도 한 것처럼 답답하던 가슴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만 같았다.



박경리 작가가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이전에 박재삼문학관을 찾았을 때 올랐던 강구항 서피랑 언덕 너머에 있는 생가터를 보고 알았다. 통영 출신인 박경리 작가가 섬진강을 따라 하동으로 들어와서 평사리를 찾은 것은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지’라는 대작의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우연 아닌 필연이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하여 해방과 전쟁을 관통한 소설의 전개 과정 전부를 다양한 인물의 삶을 통하여 그려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평사리였어야 한다는 필연적 운명은 애초 작가가 인연이라고는 전혀 없이 달랑 지도만 한 장 들고 한 번도 찾아와 본 적도 없는 평사리를 찾아 소설의 배경지로 선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삶을 평사리에 묻었다.



문학관은 1층의 한식 목조 구조 건물이었고 입구 전면에는 출입문 양쪽으로 2024년 토지문학제 수상 작가의 사진과 소개, 그리고 평사리문학대상 역대 수상자의 소개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작가의 유품과 여러 출판사에서 발간한 토지 서적, 작가의 초상화와 영상물, 그리고 소설 토지 속의 인물 지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오른쪽 벽면은 전체를 꽉 채우는 부조 형태의 여러 인물 조각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인 박경리라는 명성에 비해 비교적 조촐한 전시물처럼 느껴졌지만, 다른 전시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주요 등장인물 이십여 명의 초상 같은 전시물은 나름 신선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작품을 집필 중에 찾아온 암, 그리고 암을 치료하고 회복기에 들어서면서 느꼈던 죽음의 공포, 암이라는 병에 대한 두려움은 역설적으로 작가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듯하다. 대하소설을 집필하는 작가의 공통적 특징,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치 무슨 주술에라도 걸린 듯한 맹목적인 집필에 대한 열정은 박경리 작가에게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나 보다. 언어가 진실과 소망의 강을 건너는 배라고 생각한 작가의 문학적 소신이야말로 작가가 25년에 걸쳐 토지라는 대하소설을 완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학관을 찾는 목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런 기대 없이 편하게 찾은 문학관에서 이렇게 작가만의 작품 세계의 근간이 되는 사연을 접했을 때의 희열은 무엇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박경리문학관에서 다시 한번 느꼈다.



문학관을 다니며 육필 원고를 많이 구경하다 보니 가끔 원고지에 대한 향수를 느낄 때가 있다. 오영수문학관에서도 그랬고 혼불문학관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오영수문학관에서는 문학관에서 인쇄하여 ‘오영수문학관’이라고 작은 글자로 새겨진 원고지를 몇 권 얻어온 일도 있었다. 왠지 그 원고지에 시라도 한 편 적으면 그럴듯한 시가 나올 것 같은 기대감이 있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 박경리문학관에도 필사 체험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 역시 박경리문학관이라고 새겨진 원고지가 몇 권 올려져 있었다. 원고지를 보는 순간 잠시 잊었던 탐욕이 솟아올랐다. 해설사에게 혹시 원고지를 한 권만 얻을 수 있냐고 물었다. 내 부탁을 들은 해설사는 어디론가 가더니 잠시 후 여분의 원고지가 없어서 미안하지만 줄 수 없다고 했다. 아쉬웠지만 그냥 올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그 원고지에 글을 쓴다면 나도 멋진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만의 상상이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문학관을 나와 내려오는 길에 연세가 드신 어르신 부부가 숨을 헐떡이며 걸어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아까 나도 숨을 헐떡이며 느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역시 지리적으로는 적합한 곳에 건립되었겠지만, 아무래도 문학관 앞까지 차가 올라가지 못하는 부분은 문학관 측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관 입구 건너편에 문학관 전용 주차장을 조성할 만한 공간도 있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지금까지 찾았던 문학관 중에 박재삼문학관이나 청마문학관 이상으로 접근성은 그다지 좋지 않은 문학관이었다.



차를 세운 곳까지 내려오니 아내와 딸은 그 앞의 식당에 들어가 있었다. 나도 들어갔는데 정작 주인이 없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차를 세운 미안함과 허기진 우리의 뱃속을 잠시 달래기 위하여 뭐라도 하나 먹고 출발하려 했는데 잠시 일정에 혼선이 생겼다. 그때 옆의 커피숍 주인인 듯한 분이 우리 이야기를 듣더니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어디야? 지금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계신데...” 그러더니 금방 온다고 했다면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잠시 기다리다 보니 주인이 돌아왔는데 아마 식재료를 사러 언덕 아래 시내로 다녀오는 길인 듯했다. 우리는 부추 파전과 막걸리를 시켰다. 일전에 이외수문학관을 다녀오던 길에 아내와 딸이 막걸리 한 병을 나눠마신 일이 있었는데, 그때 막걸리에 맛을 들인 둘이었다. 그리고 전을 다 먹을 즈음에 콩국수를 주문해서 먹었는데,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맛이 좋았다. 오죽하면 콩국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딸까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거의 핥아먹듯 콩국수 그릇을 비웠을까? 아마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트로트 가수 정동원이 웃고 있었을 것이다. 식당 온 벽 가득히 걸려있던 하동 홍보대사 정동원 얼굴이.



그렇게 배를 채우고 우리는 다시 순례길을 나서듯 다음 문학관으로 향했다. 강진의 태백산맥문학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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