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끊어진 아킬레스건
장애인, 공장, 노동자, 달동네, 아픈 가족 내가 주로 봐왔던 영화들 사이에서는 익숙한 이미지와 소재들이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흔히 리얼리즘과 부조리를 표현하는 그 소재들로 이미 허구인 영화 속의 또 다른 영화적 세계를 만들어낸다, 밤중에 아파하는 류의 누나와 옆방의 청년들이 네 명이나 벽에 붙어 자위를 하는 모습이 한 테이크에 담긴다. 또한 동진이 다시 류의 집에 찾아갔을 때도 카메라는 벽을 훌쩍 넘어간다. 영미의 방에 볼에 벌레가 붙은 경찰 인형, 프린트 옆에 해골, 두 사람 사이의 빨간 거울이 그때가 정확히 어느 시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발가벗겨져 눈을 떴을 때도 카메라 워킹은 비현실적으로 흔들리며 줌 아웃되고, 날카로운 음악이 흐른다. 라스폰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이란 영화는 밝아 벗겨진 연극 무대 같은 곳에서 인물들이 뭘 하고 있는지 훤히 드러난다. 그 영화와 이 영화는 닮아 있다. 카메라는 자꾸 달동네와 서울 전경들을 부감으로 비추는데 이 영화의 공간들도 ‘도그빌’처럼 밝아 벗겨진 것 같다. 영화의 공간 속에서 팽기사의 가족들이 결국 전부 약을 먹고 자살하고, 할 일 없이 자위나 하고 있는 일용직 노동자인가 싶은 젊은이 네 명 같은 사람들이 보인다.
유선의 손에 든 인형이 어느새 동진에게 박스로 전달되어 있는 것, 누나가 죽은 다음 보노보노라는 만화에서 너구리가 목을 매는 장면 등 편집점이 인물의 행동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바뀌는 것이 흥미롭다. 교차 편집되며 영미가 류에게 한 말에 동진이 죽인다고 답하는 것도 그렇다. 류와 동진의 복수가 볼트와 너트처럼 맞물려 있고 둘 중 누가 죽어야 끝난다는 걸 알 수 있다. 귀신이 등장하지 않는 호러가 더 소름끼치듯이 유선의 몸이 부검실에서 찢겨지는 소리가 카메라 밖에 들리는 게 더 끔찍하다. 동진도 견딜 수 없어 눈물을 보이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런데 이 장면과 아주 대비되게 류의 누나의 몸에 절단되는 걸 보고 동진은 하품을 한다. 이 때 동진이란 인물이 완전히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영미는 죽이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동진은 무표정하게 전기 스위치를 누른다.
수업시간에 한 교수님께서 17대 대선을 분석한 팀이 당시 이명박 후보를 경제 대통령이라고 설명하자 ‘경제는 좋았던 적이 없었다. 항상 나빴다.’고 말씀하셨다. 엄마에게 2001년이나 2002년쯤 시대 상황이 어땠냐고 묻자 ‘서민들은 항상 어려웠고 뭐 경제도 그랬지.’라셨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면 동진이 경찰에게 ‘IMF시대 때 회사 혼자 어렵게 일으켰는데 돌아온 건 이혼뿐이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옛날이 지금보다 뭐든 나았을 거라는 내 이상한 판타지가 깨져버렸다. 사는 건 언제나 팍팍했다. 내가 가끔씩 시켜먹는 피자가 팽기사의 단칸방 막내아들처럼 죽기 전에 한번 실컷 먹어볼 수 있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복수는 인간 스스로가 느끼는 죄의식 같은 게 그걸 더 불붙게 하는 측면도 분명하지만, 또 다른 불쏘시개인 사회구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청각 장애인 류가 공장에서 복덕방 아저씨에게 사회적으로 받는 취급, 벗어날 수 없는 가난함, 답이 없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급진적인 사회주의에 경도된 영미, 역시 전기기술자로 시작해 자수성가해 동진은 또 다른 사장님이 되었다. 섣부를 수도 있고 어떤 일반화일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에는 세 인물들이 측은하다. 그들은 토스되는 불붙은 공을 어쩌다 받아 제 몸이 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붙잡고 있던 사람들이다. 선혈이 낭자했던 세 명의 인물들의 죽음과 복수가 내게는 너무 슬프다 몸이 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