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의 시작

주미와 수연의 산티아고 길

by 정루시아

프랑스 생장(St. Jean Pied de Port)에 도착한 주미와 수연은, 네 명이 함께 자는 숙소에서 순례길 첫날밤을 보냈다. 모두 긴 여정을 앞두고 긴장한 표정이었다. 수연은 미국에 있는 아들과 영상 통화를 했고, 주미는 딸과 아들에게 생장에서 만든 순례 여권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주미는 순례길 중 가장 험하다는 피레네 산도 무사히 넘었다.

28km의 길이었지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날씨였다.

4월 20일인데 산 중턱에 접어들자 눈비가 내렸다. 짙은 운무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출발할 땐 15명이 함께였지만, 걷는 속도가 다 달라 모두 흩어졌고, 주미와 수연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4월이 순례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라 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서자, 길은 온통 눈밭이었다. 산 아래와 산 위 풍경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고, 20cm는 족히 되는 눈 속에 신발이 푹푹 빠졌다.

몇 시간을 추위에 떨다가 한 평 반 남짓한 대피소에 들어가자, 순례객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불안했다. 눈은 사방에 쌓여 있었고, 비바람은 거세게 몰아쳤다.


수연과 주미는 돌덩이 같은 칼로리 바를 씹어 넘기며 서로에게 물었다.


“주미야, 괜찮지?”

“그럼~. 난 겨울에도 길을 많이 걸어봤잖아. 견딜만해. 그런데 너는?”

“그럼, 걸을 만하지. 이 정도 추위야… 전남편 독설보단 따스해.”


수연의 입에서 “이 추위가 전남편보다 낫다”는 말이 튀어나오자, 주미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주미도 속으로 생각했다. ‘십수 년 동안 원치 않는 끈적한 액체를 아랫도리에 삼킨 것에 비하면, 이 정도 눈비가 대수일까?’


대피소를 나와 둘은 빠르게 산등성이를 내려왔다. 비탈진 눈길은 미끄러웠지만,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디디며 내려오자 이내 눈은 사라지고, 따뜻한 바람과 함께 이름 모를 보라색 꽃이 길가에 피어 있었다.

정상의 날씨와 산 아래의 풍경이 이토록 다르다니. 주미는 문득 생각했다.


‘한 침대를 써도, 한 사람은 눈밭에 있고 다른 이는 꽃밭에 있을 수 있겠구나.’


순례길 첫날은 꼭 주미의 결혼생활 같았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에스(Roncesvalles)의 수도원 알베르게에 도착한 뒤, 주미와 수연은 언 몸을 녹이며 서로를 다독였다.


“호락호락하지는 않겠지만, 하루하루 버티다 보면 30일도 가겠지.”


걷기를 꽤 해온 주미는 긴 걷기도 버틸 만했지만, 수연은 이틀이 채 지나기도 전에 발에 물집이 잡혔다. 숙소에 도착하면 주미는 수연의 물집을 터뜨리고, 자신이 챙겨온 마찰 방지 테이프를 발가락에 정성스럽게 붙여주며 무심히 말했다.


“하루에 여섯 일곱 시간 걷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발가락이 얼마나 힘들겠냐? 신발이랑 발이 마찰되면 연약한 피부가 그걸 견디려고 물집을 만드는 건데…. 물집은 사실 주인한테 말하는 거거든. ‘그만 걷자, 좀 쉬자, 뭐라도 대책을 세워라.’ 결혼생활도 그래. 힘들고 이상하면 바로 눈에 띄는 징후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보이지도 않고, 분명히 알 수도 없으니… 그래서 힘들었어.”


수연은 주미가 자신의 발을 잡고 물집을 터뜨리며 그런 넋두리를 하는 게 신기했다. 길을 오래 걸어본 사람 특유의 의연함과 담백한 태도, 완급 조절, 그리고 속도 조절까지…. 수연은 주미의 무던함과 단단함이 든든했다.


“넌 참 단단하게 걷더라.”


수연이 말했을 때, 주미는 피식 웃었다. 그러곤 되려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물집 잡힌 발로 당당하게 웃으며 걷는 네가 더 부러워.”


수연은 주미가 자신의 발에 바늘을 찔러 물집을 터뜨리고, 가는 실을 꿴 바늘로 물집을 관통한 후, 실로 매듭을 묶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나도 20km까지는 몇 번 걸어봤는데, 20km를 넘으니까 물집이 생기네.

근데 어때. 어차피 썩어질 몸인데 물집 정도로 죽기야 하겠어? 그냥 가보는 거지.

가다가 힘들면 난 택시 탈 거야.

산티아고 성인도 말도 타고, 달구지도 타고 가지 않았겠어? 형편대로 맞춤형으로 가는 거지.

꼭 정석대로 해야 하란 법은 없잖아?”


힘들 때마다 수연은 ‘택시 타자’, ‘달구지 타자’는 말을 하곤 했다.

자기 스타일에 맞는 순례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수연은 끝까지 고통을 참고 걸었다.

시종일관 유쾌한 태도를 잃지 않는 수연이, 주미는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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