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의 삶
‘용서의 언덕’을 오르기 전, 물집으로 얼굴을 찡그리던 수연이 쉬자고 했다. 주미는 배낭에서 작은 보온병을 꺼내 수연에게 건넸다.
수연은 방긋 웃으며 숭늉을 한 모금 마시더니 감탄했다.
“야, 너는 진짜 준비성 하나는 끝내준다. 어떻게 보온병 챙길 생각을 했냐?
짐 정리하느라 정신도 없었는데~ 언제 숭늉을 끓였 대? 따뜻하니까 살겠다.
4월 중순 스페인이면 더울 줄 알았는데, 왜 이리 쌀쌀하냐?
아침엔 해가 쨍해서 괜찮을 줄 알았더니, 인솔팀장이 비 온다더니 정말 귀신같네.”
정말 그랬다.
쨍했던 햇살은 두어 시간 만에 사라졌고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해가 없으니 날씨는 더 쌀쌀했다.
수연은 발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주미가 건넨 숭늉을 마시며 감탄을 거듭했다.
“주미야, 네 남편은 얼마나 좋겠냐?
착하지, 준비성 좋지, 애들도 잘 키웠지…
내가 남자라면 너랑 사는 게 행복이겠다.”
주미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몰라서 그래.
난 건조한 여자야.
너처럼 생기 있고 활력 넘치는 사람이 아니야.
그냥 메마른 여자야.”
수연은 눈을 흘기며 보온병을 주미에게 돌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니?
메마른 여자가 이렇게 따뜻한 숭늉을 챙겨?
됐고! 이제 가자. 따뜻하니까 힘이 나네. 올라가야지.”
수연은 양손에 스틱을 꽉 쥐고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주미는 그 뒤를 따라가며 웃음이 났다.
자신을 스스로 ‘건조하다’고 규정하다니, 참 우습기도 했다.
‘언어란 이런 거구나.
몇 마디 말로
자신의 가장 내밀한 세계를 노출하다니…’
주미의 쓴웃음이 스틱 소리에 섞여 언덕길 위로 번졌다.
주미는 수연과 함께 걷는 이 시간이 낯설었다.
벌써 나흘째 함께 걷고 있지만, 어쩌다 이곳에 와 있는 건지 생경했다.
무심코 수연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했고, 왜 그리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를 ‘집’이라는 울타리 속에 가둬왔는지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