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먼 산티아고 순례길!

내려놓음과 얻음

by 정루시아

딸이 서른이 되어 결혼한 후, 주미는 협 탁 속 튜브를 버렸다.

딸의 신혼여행 기간, 남편이 협 탁을 열어 튜브를 찾았고 주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여보, 내가 버렸어.”


남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해 되물었다.


“왜? 당신 좋아했잖아. 그거 없으면 아파서 못하잖아.”


남편에게 튜브는 사랑과 배려의 도구였다. 그걸 버렸다는 말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주미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쉬고 싶어. 여보.
정 하고 싶으면… 나가서 해.
더 이상은 못 하겠어.”

“무슨 소리야? 나가서 하라니? 당신, 제정신이야?”


남편은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날 이후,
주미는 매일 아침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집 근처 호수를 걷기 시작했다.

정확히 3년 전 일이었다.

처음엔 30분도 못 걸었다. 햇살은 눈이 부셨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무엇보다 쌩쌩 지나가는 사람들의 생기 앞에 주눅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날 저녁,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운동화 밑창을 통해 전해진 땅의 감촉이 자꾸 떠올랐다.

그저 평범한 흙 길이었을 뿐인데.

호수길을 걸을 때면, 호수 물의 작은 입자들이 자신을 채워주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1년 넘게 그 길을 돌고 또 돌았다. 아들이 졸업 후 해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딸도 사위와 함께 싱가포르로 떠난 뒤엔 주변 호수를 넘어 전국의 둘레길을 찾아다녔다.


남편은 함께 걷진 않았지만, 막지도 않았다.

순례길의 셋째 날이 되자, 수연의 오른쪽 둘째 발톱이 검게 변했다.

주미는 오히려 걸을수록 힘이 났고, 수연은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지쳐갔다.

주미는 사진을 찍기 위해 이미 지나온 길을 다시 가기도 했고, 숙소에 도착한 뒤에도 혼자 성당이며 작은 가게들을 찾아다녔다.


주미 자신도 이상했다. 왜 이 길이 이렇게 좋은 지, 왜 이토록 가슴이 벅 찬지.


4일째는 팜플로나(Pamplona)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를 가는 길이었다. 인솔팀장은 ‘용서의 언덕’이 볼만하다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용서’라는 단어는 두 사람 모두에게 묘한 여운을 남겼다.


용서의 언덕을 향해 가는 넓은 구릉지엔 유채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며칠 전 내린 비 덕에 꽃은 더욱 싱그럽고 화사했다.

주미는 키보다 조금 낮은 유채꽃 사이에서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노란 유채꽃과 연 초록 밀이삭이 온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졌고, 구불구불 이어진 순례길은 실타래처럼 용서의 언덕을 향해 나아갔다.


주미는 문득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걸까?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얻으러 오는 걸까?’


그녀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수연이 가자고 했기에 따라왔을 뿐인데, 이유를 모른 채 걷고 있었다.

걷고 또 걸으며, 주미는 자신의 새벽 시간들, 팬티를 갈아입던 시간들이 조금씩 지워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건조하고 마른 자신, 하고 싶지 않은 섹스를 꾸역꾸역 받아들이던 자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던 자신.

그 모든 ‘과거의 나’가 이제는 멀어지고 있었다.


주미는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 자신의 뱃속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음을...

자궁 속에 비겁함과 윤활제, 정액이 뒤엉켜 하루하루 쌓여 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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