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언덕

참 용서는 어디서 올까?

by 정루시아

생각에 잠긴 채 언덕을 오르다 보니, 많은 순례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용서의 언덕’은 자연이 그려 놓은 거대한 화폭의 중심에 서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구릉지대에 유채꽃과 밀밭, 목초지가 부드럽게 펼쳐져 있었다.


스페인 농부들이 오래도록 가꿔온 대지는, 인간의 노동과 자연이 함께 만든 협주곡 같았다.

거칠 것 없는 농지 위로 바람은 자유롭게 날았다.


그래서였을까?

어제 내린 비, 지금 불어오는 바람이 주미의 메마른 마음과 자궁 깊숙한 곳까지 수분을 채워주는 듯했다.

용서의 언덕 벤치에 앉은 수연은 조용히 먼 능선을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수연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나… 주책이지?”


당황한 듯 웃으며 주미를 바라보는 수연의 작은 볼 위로, 투명한 눈물이 길이 났다.

주미는 아무 말 없이 배낭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수연은 눈물을 닦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용서의 언덕이라잖아. 용서해야지. 다… 용서해야지.”


무엇을, 누구를 용서하려는 건지 주미는 묻지 않았다.

벤치에 앉은 두 사람 사이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지나갔다.


십 분이 지났을까?

눈물을 훔치던 수연은 이내 웃음을 띠며 열 살 아이처럼 벌떡 일어섰다.

사진을 찍자며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외국인 순례자들에게 핸드폰을 맡겨 동영상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참 이상한 언덕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수많은 순례자들과도, 눈인사만으로도 묘한 동질감이 피어났다.


언덕의 이름 때문이었을까? 수연의 붉어진 눈과 그 위에 투명하게 맺힌 눈물을 보는 순간, 주미의 아랫배에서 알 수 없는 물기가 솟구치며 가슴에 눈물이 가득 찼다.


‘인생에는 긴 말이 필요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이곳이 그랬다.
용서의 언덕.’


삼십 분 가까이 언덕 위에서 시끌벅적하게 머물던 주미와 수연은 바나나를 먹고 언덕을 내려갔다.

그때, 수연이 토하듯 말을 쏟아냈다.


“너도 알지? 나 이혼한 거.
참고 살려고 했어.
근데, 그 인간이 상위 1% 타령을 계속하는 거야.
그때까진 그래, 자기가 워낙 잘났으니 봐줄 수 있었어.
그런데 민이가 루저래~.
그리고 그 루저가 된 게 다 내 탓 이래.”


주미는 말없이 걸었다.

수연이 아들 민이의 이름을 언급할 때, 주미는 수연 눈가에 스치는 이상한 광기를 보았다.

내리막길은 생각보다 길었고, 길 위에는 크고 단단한 돌들이 가득했다.


‘수연의 인생도, 이렇게 큰 돌들이 가득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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