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에서 평범을 묻고
성미와 덕희는 생장에 도착해 짐을 풀고, 인천공항에서 처음 본 네 명의 여자와 한방을 썼다. 17명의 순례자 중 남자는 4명, 여자는 13명이었다. 그중에는 이미 두 차례 순례길을 경험한 70대 여성부터 세계 곳곳을 여행한 이들까지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첫날,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모두는 조용히 짐을 정리하며 인솔팀장의 호출을 기다렸다.
젊은 여성 인솔팀장을 따라 17명의 순례자들은 엄마 오리를 따르는 아기 오리들처럼 두리번거리며 생장의 순례자 카드 발급 사무실로 향했다. 이미 그곳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 긴 줄을 서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사진을 찍고, 무료로 제공되는 조개껍데기인 가리비를 고른 뒤, 카드에 도장을 받았다. 성미와 덕희는 일행들과 함께 인근 슈퍼에서 다음 날 먹을 간식과 물을 사고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앉아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키가 크고 허벅지가 탄탄한 여자 인솔팀장은 씩씩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을 든든히 먹어 두라는 것이었다. 피레네산맥을 넘는 일정은 시차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평소 산을 잘 타는 사람도 쉽게 지친다고 했다.
그때 남자들 중 한 명이 성미를 유심히 바라봤다. 덕희는 수십 년간 남자 동료들과 일하며 익힌 감각으로 그 시선이 어떤 의미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순례길이 끝나고 나서도 그 눈빛이 성미를 향할지, 덕희는 궁금해졌다.
피레네산맥을 넘는 첫날, 너무 힘들었다는 주미와 수연의 말에 덕희와 성미는 각오를 다지며 새벽부터 출발했다. 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산을 오르는 내내 하늘은 파랗고, 그림 같은 경치가 이어졌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순례길을 오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5월 초라 덥지도 춥지도 않아,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시차 적응도 잊은 채 발걸음이 가벼웠다.
산자락 초지엔 동글동글한 양들이 느릿하게 풀을 뜯고 있었고, 커다란 방울을 목에 단 소들도 순하게 어슬렁거렸다. 제법 가파른 비탈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부터 양과 소들은 평화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나라 산이라면 빽빽한 나무들로 사람조차 오르기 힘들 텐데, 이곳은 나무를 베어내고 오히려 양과 소를 키우며 능선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언제부터 시작된 일인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덕희와 성미는 피레네산맥을 넘은 저녁, 단체 채팅방에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올렸다. 주미와 수연은 “부럽다”를 연발했지만, 숙이는 짧은 메시지만 남겼다.
“너희는 다 가보는데, 나만 이러고 산다. 몸 조심하고.”
첫날을 무사히 넘기고, 둘째 날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에서 수비리(Zubiri)로 걷는 길, 덕희가 씩씩하게 말했다.
“난 네가 늘 부러웠어. 혼자서도 멋지게 살아서 말이야. 넌 어려서부터 공부도 잘하고 예쁘고. 한 십오 년 됐나? 내가 워낙 사는 게 바빠서 모임에 늦게 나갔을 때, 너만 보이더라. 너무 환하고 세련돼 보여서.”
“내가? 뭘~. 수연이가 예쁘지. 그리고 걘 이혼하고도 당당하잖아.”
“허긴, 수연이 참 당차지.”
“교수라는 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니잖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난 완전 허당이야. 바보야!”
성미는 무심한 듯 길을 걸으며 말했다. 덕희는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네가 바보면 다른 사람은 다 죽어야지. 자기 일 똑 부러지게 잘하고, 뭐 걸릴 것도 없잖아. 독신으로 사는 네가 부러워. 애만 아니었으면 나도 결혼 안 했을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은행 다니다 보니 혼자인 여자들은 자꾸 구설에 오르더라고. 남자들이 말로든 행동으로든 집적거리는 게 싫어서, 그냥 때에 맞춰 결혼했지. 그런데 결혼이 여자에겐…… 직장 다니며 애 키우는 여자에겐 정말 힘든 일이더라. 좋은 게 아니야. 아주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기분이랄까.”
“혼자 사는 거? 편할 것 같지? 그냥 그래! 아버지가 계집질하는 게 너무 싫어서 혼자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순한 남자 만나서 결혼하고 싶어. 인생이란 게 별거 없는데, 좁은 생각으로 겁을 냈던 것 같아. 정말, 별거 아닌데.”
“야, 그 말 하지 마. 혼자도 좋아. 뭐가 아쉬워? 결혼생활, 별거 없어!”
“꼭 해본 사람들이 하지 말라더라. 자기들은 다 해놓고!”
“그런가? 그럼 해보든가. 여기서 한번 찾아보든가.”
"여기서? 여긴 풀이 너무 좁지 않나?"
"넓으면 뭐 하니? 다 만나볼 것도 아닌데."
둘은 말장난처럼 주고받은 말을 쓸데없는 소리라며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 몇 시간을 힘차게 걸은 후, 둘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탄복했다. 조금씩 올라온 길이었는데, 야트막한 언덕 아래로 길은 한없이 뻗어 있었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묵묵히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장관이었다. 저마다의 삶과 생각을 품고 있는 이들이 한 줄로 이어져 걷는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성미는 왠지 마음이 처량했다.
‘어차피 결혼도 산티아고 길처럼 삶을 살아가는 한 방편일 뿐인데, 뭐가 그리 겁나서 내민 손을 뿌리쳤을까? 왜 그렇게 행복하지도 않은 시간을 혼자 살겠다고 장담했을까?’
덕희는 경치를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했다.
"허긴,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편하지. 그래도 난 네가 부러워. 야~ 이 나이에도 남편 눈치 보는 건 정말 지치거든. 예순 바라보는 나이에 남편 밥타령이라니, 아주 징글징글하다니까."
덕희는 아이들을 키우고 직장을 다니느라 40대 초반이 되어서야 친구들과 다시 만났다.
그 당시 덕희가 본 성미는 전문직 여성의 단단하고 절제된 자세와 어딘지 모를 차가움을 느꼈었다. 반면 성미는 덕희의 여유로운 모습과 태도 속에 확실한 자기 기준이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였을까? 성격이 달라도 덕희와 성미는 함께 순례길에 나설 수 있었다.
수연이 남편의 외도로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성미는 이상하게도 수연을 보면 죄의식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수연 남편의 내연녀라도 된 듯 마음이 불편했다. 자기 처지를 친구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지만, 성미는 수연에게 미안했다.
덕희는 길을 걸으며 아이들 이야기를 자주 했다. 무던한 큰딸과는 달리 성격이 딴판인 둘째 딸, 그리고 늘 어린애 같은 막내아들 이야기까지. 자식을 둔 부모라 그런지, 말끝마다 아쉬움이 묻어났다.
"다 내 욕심이지. 내가 욕심을 덜 냈으면 좋았을 텐데."
덕희는 자식 이야기를 하며 늘 한숨과 함께 자신을 탓했다.
"난 애가 없으니 잘 모르지만, 애 키우는 엄마들은 다 그렇지 않냐? 내가 아는 선배들도 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더라고. 너무 자책하지 마."
성미는 최대한 건조하게 말했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는 영역에 대해 쉽게 말할 수는 없었다. 성미는 힘을 뺀 목소리로 길 앞을 바라보며 덕희에게 말했다.
"너는 그래도 남편도 잘 만나고, 애들도 잘 키우고, 다 이뤘잖아. 나는 말이야, 독신주의자랍시고 혼자 늙어갈 일만 남았어. 부럽다, 네가."
"뭔 소리야. 네가 가겠다 맘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가지."
덕희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받아쳤다.
"다 때가 있지. 지금 가려면 어디 늙은 노인네 병시중이나 들러 가는 거지. 그러니 그냥 내친김에 혼자 살아야지. 그래서 이참에 걸어보자고 왔잖아. 누가 알아? 여기서 파란 눈을 만날지?"
"그럼~ 그럴 수도 있지."
성미는 크게 웃었고, 덕희도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