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깨달음
13일째, 부르고스(Burgos)에서 온타나스(Hontanas)로 가는 길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두 사람은 알베르게에서부터 우비를 입고 길을 나섰다. 대도시 부르고스를 4km쯤 걸어 빠져나올 때까지는 괜찮았지만, 도시를 벗어나자 길은 온통 물바다였다. 몇 킬로미터씩 이어지는 진흙길에 신발이 빠지고, 진흙이 발에 붙어 무거워졌다. 풀을 밟아 걷다가도 깊은 웅덩이를 만나면 피할 길이 없었다. 몇 미터씩 물이 고인 웅덩이 앞에선, 결국 신발에 물이 드는 걸 감수해야 했다.
성미는 진흙을 헤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덕희야,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나 싶어. 부모 삶이 자식에게 영향을 주는 건 알지만, 부모 삶이 평탄치 않다고 겁먹고 결혼을 포기하진 않잖아. 난 혼자도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혼자 살다 보니까 관계의 고리가 점점 약해지더라. 불편하진 않은데, 사람이 자꾸 헐거워지고 좁아져. 직장도 있고, 취미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정작 지지고 볶는 관계는 없으니까, 어느새 뚝 떨어진 구슬 같은 사람이 돼 버린 거야. 판이 약간만 기울어도 그냥 떼구루루 굴러가. 서야 할 때 멈추지 못하고, 멈춰야 할 때 날 잡아줄 사람이 없더라고. 혼자 살며 깨달은 건, 독신이 얼마나 관계에 취약한지를 알게 된 거야. 책임질 게 없으니 편하긴 한데, 그래서 스스로 자책하게 돼. 내가 정말 잘 산 건지.”
‘뚝 떨어진 구슬 같다’는 말에 덕희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결혼 후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보러 올라왔을 때, 내 집이면서도 남편을 필두로 시어머니, 아이들까지 한 줄로 엮여 있고, 자신만 따로 떨어져 끝없이 굴러다니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덕희는 성미의 말에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성미가 자신의 인생을 길 위에 풀어놓고, 그 말들을 스스로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성미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누가 사람을 소개해주면 괜히 겁이 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선뜻 내 삶을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 두려워서 좋은 사람도 못 붙잡겠더라고. 그냥 이 진흙처럼, 달라붙으면 달라붙는 대로 함께 가면 될 텐데 말이야.”
덕희는 신발에 붙은 진흙을 길가 풀에 문지르며 담담히 말했다.
“뭐가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르지. 함께 산다고 꼭 행복한 것도 아니고, 혼자 산다고 꼭 편한 것도 아니고. 다 자기 선택이잖아. 평생 밥 타령하는 남편을 보면 속이 부글부글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 인간이 있어서 애들을 함께 키웠고, 함께 돈도 모으며 살아온 거니까. 그래서 요즘은 뭐든 감사해. 매사에.”
21일이 지난 후, 폰체바돈(Foncebadón)에서 폰페라다(Ponferrada)로 향하던 새벽이었다. 알베르게에서 요구르트를 하나씩 먹고 길을 나섰다. 산 위에 자리한 알베르게를 빠져나오자 자욱한 안개가 앞을 가렸고, 그 안개를 뚫으며 천천히 걸었다. 30분쯤 지나자 여명이 밝아오고 안개는 산자락을 벗어나 물결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길 옆에는 보라색과 흰색 들꽃이 피어 있었고, 깊은 산길은 발걸음에 맞춰 출렁이며 다가왔다. 순례자들은 철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햇살이 쏟아져, 순례자들의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능선 아래엔 안개가 자욱했고, 하늘은 점차 짙은 파란빛으로 물들어갔다. 햇빛은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순례자들 위로 쏟아졌고, 멀리 높은 언덕 위로 철십자가가 햇살 속에 우뚝 서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철십자가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덕희가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한 포즈를 취하자, 성미도 철십자가에 올라, 한 손으로 그것을 잡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17명의 팀원 모두가 독사진과 단체사진을 찍고는 다시 조용히 산길로 향했다.
철십자가라 해도, 말 그대로 흙과 돌을 쌓아 만든 작은 언덕 위에 철로 된 기다란 십자가 하나가 세워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덕희는 성큼성큼 앞서 산을 올랐고, 성미는 조용히 덕희의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성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좋아했던 남자가 있었어. 그 사람이 어느 날 그러더라. 자기가 이혼하고 오면 결혼하겠냐고. 근데… 무섭더라고. 내가 낳지도 않은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것도 그렇고. 솔직히 나도 확신이 없었지만, 그 사람도 확신이 없어 보였어. 정말 아내와 살기 힘들다면 그냥 이혼하면 되는 거잖아.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결국… 그냥 해프닝처럼 지나가 버렸어.”
“그랬구나.”
덕희는 짧게 대답했다.
두 사람이 천천히 산을 오르자, 후미에 있던 세 명의 일행이 합류했다.
성미는 천천히 가겠다며 걸음을 늦췄고, 덕희는 성미의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산 아래 마을 카페에서 만나자. 천천히 와.”
그 말과 함께 덕희는 일행들과 먼저 앞서 걸어갔다.
그리고 성미는 홀로 남았다.
맑은 하늘, 상쾌한 바람.
그런데도 성미는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선을 넘은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녀는 최 교수와 헤어진 후에도, 여전히 그를 탐냈다.
최 교수와 헤어진 후 성미의 삶은 엉망이었다. 최 교수와의 만남이 끝을 향해갈 즈음, 그는 무심한 듯 말했었다. 조심스럽게, 자기 아내가 아직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당황스러웠다고. 그 말을 하는 그의 눈에 스치듯 번진 기쁨을 성미는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성미는 이 관계를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힘든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성미는 그를 그리워하며 화장실에 앉아 있다 번득 정신이 들었다. ‘그 사람 와이프는 누구나 들어가고 볼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집의 거실, 안방, 부엌, 서재 같은 사람이고, 나는 화장실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나란 존재는 그 사람이 똥을 놓거나 오줌을 눌 때처럼 숨어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는 자기 배설을 하는 그런 화장실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하는 사실 말이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일자 성미는 자기 자신을 참을 수 없었다. 지나온 시간과 자신의 사랑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에 성미는 당혹스러웠다. 차마 그런 감정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