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버지의 사랑

곰팡이 같은 감정

by 정루시아

눈물을 훔치며 산을 오르던 성미는 오전에 지났던 철의 십자가에 쌓인 돌무더기를 떠올렸다. 그러자 어린 시절의 기억, 아버지가 젊은 여자와 살고 있던 초라한 단칸방이 문득 떠올랐다.


어릴 적, 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건너 마을의 단칸방에서 젊은 여자와 살았다. 성미는 몰래 그곳을 찾아가 보고는 어린 마음에도 혀를 차며 분노했었다. 작고 누추한 방이 역겨웠고, 그런 곳을 선택한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멀쩡한 기와집을 두고 저런 데서 산다는 게 어린 성미에겐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데 순례길을 걸으며 성미는 깨달았다. 적어도 아버지는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돈 없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내연녀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두 집을 오가며 살았다.


엄마의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아버지는 말없이 감내했다. 작고 누추한 공간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살았고, 마을 사람들의 눈총과 비난도 묵묵히 견뎠다.


그런 아버지가 다시 보였다.


성미는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다. 부족한 것 없이 살았지만, 사랑에 있어 이기적인 아버지가 싫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이 끔찍했다. 그런데 길을 걸으며 문득 깨달았다.


최소한 아버지는, 우아해 보이지만 비겁했던 최 교수보다는 백 배는 솔직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눈물이 쏟아졌다. 지독했던 원망과 증오가, 단단히 얽혀 있던 매듭처럼 서서히 풀렸다.


아버지는 내연녀라 불리던 여인의 병간호를 받으며 3년을 누워 지내다 5년 전 세상을 떠났고, 성미는 그동안 아버지를 까맣게 잊고 살았었다.


그래서일까. 능선을 걸으며, 가슴속에 숨겨져 있던 곰팡이 같은 감정이 햇볕에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순례길 끝에서, 성미의 가슴을 탁탁 털어낸다면 곰팡이 가루가 휘날리며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날, 성미는 아버지의 사랑을 불륜이라 단정하고 증오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어리석었던 사랑만큼은… 차마 용서할 수 없었다.


산을 내려오자, 작은 마을 어귀의 시냇물가에는 양말을 벗은 순례자들이 가득했다. 성미는 오래된 마을의 돌다리를 건너며 덕희를 찾았다. 덕희는 일행들과 함께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성미가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자, 일행 중 유 박사가 반갑게 손을 들어 보였다.


숙소에 도착한 덕희와 성미는 깔깔대며 주방으로 달려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입맛을 다셨다. 매콤한 컵라면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호호 불며 뜨겁고 얼큰한 국물을 탈탈 털어 마시는 두 사람의 얼굴엔 어느새 웃음이 가득했다. 언제 눈물을 흘렸던가 싶게 성미는 씩씩했다. 라면을 다 먹은 후엔 근처 슈퍼에 들러 1.5리터짜리 물과 바나나, 요구르트를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순례길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목표 지점까지 100km가 조금 넘게 남은 도시 사리아(Sarria)에 들어서니 유독 많은 순례자들이 몰려 있었다. 전체 프랑스 루트를 걷지 않더라도 사리아부터 순례자 여정을 시작할 수 있어, 그만큼 사람도, 알베르게도, 카페도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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