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덕희를 닮았던 딸과 엄마!

엄마의 넋두리

by 정루시아

덕희는 종종 큰딸과 직장을 다니는 아들과 통화를 했고, 이십 일이 지나자 남편과도 영상통화를 하며 주변 풍경을 보여주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몸은 괜찮은지, 남편이 물었고, 결혼하지 않은 작은 딸은 집에 돌아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며 덕희 남편의 불만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걜 왜 시켜요? 나처럼 밥순이 만들려고 그래요? 바랄 걸 바라야지요.”


통화를 마친 덕희는 길을 걸으며 투덜거렸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도 남편 밥 걱정을 하고 있다니… 둘째가 밥을 차릴 거라 기대한 남편도 한심하지만, 아빠랑 집안에서 신경전 벌이는 딸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다.”


사리아에서 포르토마린(Portomarín)으로 향하는 길에서 덕희는 둘째 딸 이야기를 꺼냈다.


“둘째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유별났어. 강하고, 샘 많고, 자기주장도 세고. 키울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큰애는 무던하고 책임감도 있어서 뭐든 분수에 맞게 사는데, 둘째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조금만 지적해도 난리가 나. 자길 무시한다나? 큰언니한테는 말도 못 하면서 우리한테만 뭐라 하니까 간섭이라고 우기고. 큰애는 그런 말을 하게 만들질 않으니 우리가 괜히 할 말도 없는데. 그런데 둘째는 늘 고집이니까 어쩔 수가 없어. 남동생은 지원도 듬뿍 받고 자긴 딸이라 소홀히 한다며 투덜대고~.”


말을 하며 덕희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그러다 이내 말을 던지듯 툭 뱉었다.


“뭐, 둘이 알아서 먹겠지.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 지지고 볶든지 말든지.”


순례길을 이틀 남긴 어느 날,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에서 아르수아(Arzúa)로 걷던 중 덕희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둘째가 밥을 안 하니까 결국 남편이 먼저 차려서 아침 먹고 가라 했대. 그런데 걔가 시간 없다며 휑 가버렸대나 뭐래나? 저녁에 와서는 설거지는커녕 자기 먹을 것만 사 와서, 방에 들어가선 나오지도 않더래. 강적이야, 강적. 샘통이지 뭐. 어디서 그런 애가 나왔는지.”


덕희의 얼굴엔 묘한 해방감이 비쳤다. 평생 밥 타령하던 남편이 드디어 혼자 밥을 차리고, 설거지도 했다는 소식에 이제 자신이 평생 밥상을 차릴 필요는 없겠다는 안도감이 깃든 듯했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걸은 후, 덕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야, 처음 이 길을 걸을 땐 그냥 다 좋았어. 길도 좋고 밥상 차릴 필요도 없고. 간단히 먹고, 필요하면 그냥 사 먹고, 걷고 구경하고, 잠만 자면 되니까.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자꾸 엄마가 생각나더라. 그리고... 너무 죄송했어."


덕희는 말을 이어갔다.


"왜 어제 포르토마린에서 팔라스 데 레이로 갈 때 너 먼저 가라고 했잖아. 발목이 불편하다고. 사실은 천천히 걷고 싶었거든. 그날, 천천히 길을 걷다가 지랄 맞은 둘째 생각이 나더라고. 걔가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어린 시절부터 극성을 부려서 속이 부글거려도 참았어. 그런데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그러더라고. 다 컸는데 그러니까 참기가 어렵더라고. 그래서 어느 날 ‘넌 왜 엄마에게 말버릇이 그러냐’ 했더니 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 더러 그러더라. ‘왜 엄마도 할머니한테 똑같이 했잖아. 아침에 출근하면서 힘들어 죽겠다 하면서 할머니에게 막 뭐라 했잖아. 그러면 할머니가 엄마 출근한 후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아유 내가 참아야지.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들면 저러나? 힘들게 벌어서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내가 무슨 낯짝으로, 할머니가 앉아서 엄마가 나가면 얼마나 구시렁 됐는 줄 알아? 하루 종일 구시렁 됐어! 내가 그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 줄 알아? 내가 엄마 닮았는데 왜 나한테 뭐래?’

딸년이 그러더라니까?"


덕희는 울먹였다.


"순례길이 끝나가니까 엄마 생각이 너무 나는 거야. 너 먼저 가라고 해놓고 나, 진짜 한참 울었어. 이 길이 엄마한테 드리는 내 속죄 같더라고. 이 길을 걷지 않았으면, 아마 난 내 잘못도 모르고 살았을 거야. 그래서 이렇게 걷는 게 행복하고 감사하고, 그러네."


성미는 그런 덕희의 눈가에 맺힌 촉촉한 눈물을 보며 마음이 찡했다. 전문직 여성으로서, 세 아이를 키우며 치열하게 살아온 친구가 친정 엄마에 대한 감사와 속죄를 털어놓는 모습은 눈부시게 숭고했다.


덕희는 우리 다섯 중 키도 가장 작고, 집안 형편도 넉넉지 않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례길 위에서, 누구보다 크고 단단하게 보였다. 성미는 그런 덕희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덕희야, 너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낳아 기르고, 남편과도 잘 지내고. 뭐가 부족하고 뭐가 모자라니? 이 모든 걸 네가 다 일군 거잖아. 정말 멋져. 너랑 이렇게 걷게 돼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멋있는 친구랑 함께 걷는다는 게 참 좋아."


덕희는 성미의 말에 웃으며 살짝 몸을 밀쳤다.


"야, 너야말로 부럽지. 넌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잖아. 남자도 새로 만나고, 안 그래? 넌 아직도 가능성이 열려 있는데, 난 이제 모든 가능성이 제로야."


"그런가? 그럼 사랑 좀 해볼까?"


"그래. 너 아직도 괜찮아. 나는 할머니지만 넌 아가씨야. 저기 유 박사가 계속 널 시간 날 때마다 보던데? 한국 가서 한 번 만나봐."


"뭔 소리야! 누가? 됐어, 그만해."


둘은 깔깔대며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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