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결혼한다니 너무 아까워서 배앓이를 했나 봐!
딸의 시간 14
상견례 자리서 환하게 웃으며 밥을 먹던 딸이, “조심히 가세요. 전화드릴게요”하며 배웅했다. 밝게 웃던 딸과 공손히 인사하던 미래 사위의 모습이 고속도로를 따라 쫓아 왔다.
딱 2시간 상견례를 했다. 아이들 자란 얘기를, 딸이 벽면 가득 그림을 그리던 얘기며, 미래 사위의 영리함에 대한 얘기들이 한식 코스 처럼 펼쳐졌다. 정작 결혼 관련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잘못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오해와 불화를 불러오는지 아는지라 양가 부모란 네 사람은 그저 자식들의 성장 얘기로 상를 채웠다. 정보랄 것도 없는 얘기들을 나누며 서로 많이 드시라 했다.
젓가락이 계속 방황했다. 딱히 뭐 먹고 싶은 것이 없기도 했지만 미래 사부인의 한마디가 목에 턱 걸렸기 때문이다. “아유~ 이제 딸 하나 얻었다 생각해요.” 일상이건 TV 드라마에서건 그런 말들은 낯설지 않은 것이어서 사실 목에 걸릴 일이 아니라 하겠지만 내 목엔 '딱 걸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내 딸처럼 여기며 잘 보살피고 가르치겠다는, 예쁜 며느리와 잘 지내겠다는, 마음을 응축하여 말한 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 그 말이 턱 목에 걸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 사위를 아들처럼 생각해?” 남편은 운전대를 양손으로 힘껏 잡고는 피곤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들은 아들이고 사위는 사위지! 사위가 어떻게 아들 되나~.” 나는 남편을 보고 “그러게 난 사위를 아들같이 여기겠다 생각하지 않는데 왜 우리나라 시부모들은 한결같이 며느리를 딸같이 여기겠다고 할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가?”하니 남편이 “그런가?” 했다. 남편은 잠시 고속도로를 뚫어질 듯 바라보다 입을 뗐다. “남의 자식이 어떻게 선언으로 자기 자식이 되나! 과정도 없이. 과정이 있어도 어떻게 천륜의 영역을 넘어, 넘어설 수 없지.”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그래서 유교문화에선 천륜은 못 넘으니 제도로 여자 정체성을 그리 지우고자 한 것 같아, 호적을 옮기고, 출가외인이라 하여 친정 출입을 삼가고, 여자 터전을 지워버리고 남자 집안에 건더기 없는 멸치국물처럼 스미도록 말이야." 내가 분개하며 말하니 남편은 그저 앞만 보고 운전하다 한마디 했다. “이젠 호적제도 없어졌고, 출가외인은 무슨, 명절에도 모두 왔다 갔다 하잖아, 그건 다 옛날이야기야.” 했다. 내가 “그런가? 원래 당한자는 잊지 못하고 행한자는 쉽게 잊지.” 했더니 남편은 “이제 서로 예의를 잘 갖춰 지내면 돼지.”하고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내가 “아 뭘 먹었는지 모르겠네.”했더니 남편도 “그러게 뭘 먹었는지~”하곤 앞만 보고 달렸다.
상견례 후 일주일 넘게 배앓이를 했다. 탈이 난 것도 아닌데 가슴부터 아랫배까지 답답했다. 소화제를 먹고 남편이 마사지를 해도 소용 없었다. 전기 찜질기를 꺼내 하루 종일 배에 감고 있었다. 그 뜨거운 찜질기의 열기에도 배의 찬 기운은 가시질 않았다. 일주일이 넘고 9일이던가 10일째 되던 때 딸과 카톡을 하다 ‘배앓이를 한다’ 하니 딸이 ‘왜 그러시냐’고 ‘얼른 쾌차하세요’라며 이모티콘을 보냈다. ‘퇴근 후 전화해줘라’ 하니 '네~~'하곤 늦은 밤 딸이 전화를 했다.
“엄마, 배는요? 좀 편안해졌어요?”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그저 그러네~”하며 맘속에 있던 말을 뚝 던졌다. “남이, 너를 ‘내 딸이다 여긴다’는 그 말이 너무 싫어서 배알이 꼴린 게 아닌가 싶다!” 딸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 벤 목소리로 “엄마, 무슨 소리예요.” 했다. “생각해 봐. 어디다 내놔도 예쁘고, 착하고, 다부지고, 성정이 부처 가운데 토막 같은 애를 키웠더니, 몇번 보지도 않던 너를 딸이라 여긴다하니 갑자기 아깝다는 생각이 확 들잖아.” "엄마, 왜 그래요. 그냥 노상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하신 건데. 제가 엄마 딸이지 누구 딸이겠어요. 참!” 내가 정색을 하며 “아니~ 딸! 정말 배가 아팠다니까. 이건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수준이 아니라 뭐랄까 정말 뱃속 깊은 곳에서 냉기가 서린 배 아픔 이었다니까! 너랑 대화를 하다 보니 정말 그랬나 보다. 그 말을 하니 배가 좀 시원해지는 걸 보니.”이리 말하니 딸은 호탕하게 웃으며 “정말 엄만.” 했다. 딸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속도 편해지고 내 한심한 넋두리에 나 스스로도 기막혀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그것만 잘 알아둬, 엄마가 엄청 배가 아팠는데, 그 이유는 널 너무 사랑해서 배가 아팠단 사실 말이다.” 하니 딸이 숨 넘어가게 깔깔 웃었다. 내가 “딸! 가서 미래 사위에게도 단단히 일러둬. 엄마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배앓이를 했다고, 너무 아깝다고." 내가 이리 말하니 딸은 깔깔 웃던 웃음을 멈추곤 “그리 전할게요. 정말로요. 이제 일 그만하시고 얼른 주무세요. 설 연휴에 갈게요.” 했다.
딸과 통화를 하고 나니 배앓이가 가신 듯했다. 다음날 일어나니 배앓이는 없어졌다. 정말 딸이 너무 아까워서 배가 아팠나 보다. 이제 시집보낸다 하지 않고, 결혼한다 하며, 딸도 직장생활을 하고, 직장 때문에 어차피 시댁과도 떨어져 살것인데 뭐가 그리 걱정됐을까 싶다. 아마 그건 내가 들었던, 내 시어머니가 "딸 하나 얻었다 생각해요" 라 말하던 '나의 상견례와 소소한 시집살이를 소환'하여 지레 겁먹고 배앓이를 시작한 게다.
그날 저녁 남편과 차를 마시며 “딸이 결혼한다니 너무 아까워서 배앓이를 했나 봐” 했더니 남편은 핸드폰으로 뉴스를 읽다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별소리를 다 듣네, 아깝긴 뭐가 아까워.”하며 어이없다는 듯 핸드폰을 뚫어지게 봤다. 밤에 잠자리에 드는데 남편이 갑자기 말했다. “그렇지? 좀 아깝지?”난 남편의 옆구리를 똑 치며 “아니 별소리 다 한다면서, 왜 생각해보니 그래?” 불 꺼진 방에서 남편은 우두커니 천장을 바라보다 머리를 살짝 흔들더니 잠을 청했다.
남편은 딸이 결혼을 하겠다는 그 작은 징조를 보이던 시점부터, 미래 사위가 3년 전 처음 인사를 하러 온 그 순간부터, 맘을 다잡고 딸을 보낼 준비를 했다. 그리곤 결혼 말이 나오던 작년 여름부터는 딸에겐 한껏 근엄하게 “잘 살면 돼지, 네가 행복하면 돼지, 사랑하면 같이 살아야지, 부럽다.” 등 온갖 좋은 말을 딸 앞에서 해놓고는 나와 딸의 전화에서 미래 사위에 대해 깨알같은 불만이 감지되면 1초의 생각 자리를 틀 새도 없이 내게 툴툴대듯 말했었다. “난 이 결혼 반댈쎄~.” 남편도 아쉬움의 표현을 그리한 것을.. 내가 배앓이를 하듯 말이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안 귀할까?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안 아까울까? 생각해보니 모든 부모가 자식 결혼에 앞서 자식이 너무 귀해 그냥 아깝다 생각할 것 같다. 딸아! 항상 기억해 두렴. 우린 네가 아깝구나. 언제나 아까울 듯하다. 행복하다 해도, 잘 산다고 해도, 걱정하지 말라 해도 그냥 아까운 것 같구나. 그냥 부모 맘이 그렇다는 사실을, 너를 너무 사랑해서 쓸데없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미련하고 어리숙한 부모가 있음을 잊지 마렴.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할 것은, 혹 너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너의 선택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건 너를 사랑하는게 아니란걸 분명히 알아두렴. 네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육아와 집의 화목을 이유로, 남편의 일과 딸같이 여긴다는 시부모의 권유로 너의 선택이 침해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란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여자들이 명절이면 소화가 안되고, 화병이 도지고, 이혼을 하네마네 하는 문제는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에서 늘 우선권이 여자에게 없었기 때문이란다. 과거였거나 현재 진행형이거나 미래형이거나 대한민국의 결혼문제 중 그 핵심은 늘 선택의 문제란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피해자인 이 왜곡된 선택문제 때문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과거였거나 현재진행중이거나 선택권을 모두 빼앗겼던 여자들이, 이름을 지우고, 개성을 지우고, 꿈을 지우고, 대를 잇기 위해 자식과 남편에게 자신을 투영하던 시절로부터 이제 자신의 이름을 찾고, 개성을 찾고, 꿈을 이루고, 남자집 대가 아닌 나의 자식을 낳고 기르는 존재의 회복을 위한 시끄러움이지. 여자란 존재를 끝없이 멸치국물처럼 우려내 써버리고, 여자의 이름을 지우고, 엄마란 이름으로 개별적 감성의 대상으로 만듦을 거부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단다.
성 불평등의 문화권력 양수를 끝없이 재생산하는 남성중심 한국사회에서 한 가족사에 들어가 홀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란 말이지. 그러니 잘 기억해 두렴. 네가 하고 싶은 그 무엇과 너의 선택을! 이젠 판단도, 선택도, 아깝고도 아까운 나의 사랑하는 딸, 너의 몫이구나.
참고사항: 사람들이 멸치국수를 좋아하지만 멸치 비린내는 싫어하잖니, 멸치 비린내를 없애려 온갖 야채와 약재를 넣는데 그게 전통적 한국시집살이에선 바로 그 유명한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이란다. 3개월만 지속해도 습관이 되는데 며느리는 3년씩 말 말고, 들은 척 말고, 못 본 척하라니! 이런 인권침해와 인권유린이 어디 있니? 우려진 멸치가 되지 않으려면, 수많은 한국 여성들의 외침에 늘 동참하고 실천하렴. 네 딸을 위해, 네 아들을 위해. 그렇지 않으면 너도 내 나이가 되어 '배앓이'를 하고, '이런 글'을 쓸까 두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