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에피소드 4
5월의 지방도로는 젊다. 넘실대는 나무들과 사방에서 쑥 자란 잡풀들이 초록 무더기를 이뤄 토요일 아침 길은 생기롭다.
“누나가 외할머니랑 집에 왔다 갔단다”
“그래요?” 아들은 밝고 맑다.
“화요일에 할머니랑 함께 기차 타고 익산역에 와서 엄마가 픽업했지, 수요일에는 선유도에 가서 좀 걷고, 할머니는 목요일에 익산역에서 누나랑 조치원 집으로 가셨고”. 5월의 생기를 품은 아들은 그저 듣고 있다.
“누나가 참 착해, 그렇지?”하고 물으니, “네” 한다.
“너라면 그러겠니?”
“그러게요”
아들은 잠시 천안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떠올렸지 싶다. 딸은 돌이 되기 전 모유수유가 끝나고 친정 집으로 갔다. 내가 대전에서 서울로 패턴전문학원을 다녀 친정 집 신세를 지게 됐고, 연거푸 직장생활로 약 2년 외가에서 자랐다. 딸아이의 얼굴은 친할머니를 빼다 닮은 듯 해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성격은 친정부모의 무던함을 그대로 닮아 더 놀랍다. 딸은 잘 놀고, 잘 먹었으며,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할머니가 없으면, 울기는커녕, 생글생글 웃으며 아장아장 할머니가 일하던 작은 텃밭으로 나가곤 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귀염을 독차지했다.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기 보다는 상추, 부추, 오이, 가지, 고추, 토마토와 감자 등 온갖 채소를 심은 텃밭에, 땀을 흘리며 잡초를 뽑고 있는 할머니에게, 배시시 웃으며 걸어가곤 했다고, 늙은 친정 엄마는 늘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씀하셨다. “아니 애가 울지도 않고, 부산스럽지도 않고, 그냥 잘 먹고, 잘 자고 말야”,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는 유독 딸아이를 예뻐하셨다. 작은 애가 울지를 않고, 영민해! 자다 눈 떠서 우리가 없으면, 찬찬히 찾아보고 온다니까? 한 두어 시간 일을 해도 옆에서 잘 놀고, 한번 앉아 콩을 까면 끝까지 작은 손으로 깐다니까! 손도 아프고 할 터인데, 참네” 하며, 딸아이의 유순한 성품과 인내를 대견해 했다. 누나가 혼자된 외할머니를 종종 찾아가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성당도 함께 간다는 사실을 아는 아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너는 나중에 대학생 돼서 할머니 모시고 집에 오겠니?”
“내가요?”
“그래, 할머니가 널 얼마나 귀하게 키웠는데”
“글쎄요!”
“아니 할머니가 너 어렸을 때,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아무 대답이 없다.
“누나는 그때 힘들었어”
“뭐가요?”
“할머니가 너는 엄청 이뻐하고, 누나는 찬밥이어서 말야”, 아들은 말이 없다.
“맛난 것, 좋은 것은 다 네 차지고, 누나는 언제나 너 다음이고, 네가 울거나 하면 누나 탓이고 말이지”
“기억 안 나니?”
“저는 딱히…” 기억이 없는 것인지, 외면한 것인지, 아들은 무심히 고개를 젓는다.
“할머니가 아들, 아들 하니, 누나가 어떻겠니? 너도 알잖아, 남아선호 사상! 엄만, 너무 속상했는데, 엄마가 당한 것도 모자라서 할머니가 너무 차별해서 말이다”
“그러셨어요?”
“여하간 그리도 귀히 여기고 사랑했는데, 할머니 모시고 여행이나 그런 것은 생각도 않는구나. 참네”, 어린 시절 차별을 겪은 지라 딸을 칭찬하다 갑자기 아들의 무심함에 화가 치밀었다.
“아들, 아들 하면 뭘 하니! 그리 귀하다고 키운 손주는 별 생각이 없는데, 엄만, 엄마의 할머니께 얼마나 당했는지. 할머닌, 과자가 귀하던 시절 손님이 손주들 주라고 사가지 온 사탕을 귀신같이 손자는 6-8개씩, 손녀는 3-4개씩 손에 잡아주셨어, 무심히 주는데 세어보면 그리 차이가 났거든, 혹 남은 것은 손주만 챙겨 주고, 엄마가 날마다 할머니 방 청소를 했는데 말야, 혹 작은 외삼촌이 다치거나 울면, 저 계집애가 못돼서 그렇다며,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힌 소릴 들어야 했거든. 그래서 엄만 어려서부터 내가 남자와 뭐가 달라 저렇게 날 못 잡아먹어 난리인가 했지. 내 자식은 그리 키우지 않겠다 했는데, 네 할머니가 너와 누나를 그리 대하니 얼마나 싫었겠니, 할머니는 더군다나 배운 사람이고 초등학교 교사였잖아!” 나도 모르게 어려서의 차별이 5월의 산자락처럼 떠올라 숨도 안 쉬듯 말을 쏟아냈다.
“교사면 그게 뭐요?”, 아들이 한참을 듣고 있다 한마디 한다.
“아니 배운 사람이란 건 사회적 편견을 깨야 하지 않니? 네 할머니는 고등학교를 나왔고, 그 시절 그런 교육을 받는다는 게 쉬운 게 아니지” 했다.
“배움과 생활이 같나요?” 아들은 친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맘을 더해 뚝 던지듯 말했다.
“배운 사람들에겐 사회적 책무가 있어! 편견과 무지를 깨야지, 초등교육의 기본은 평등교육인데, 남녀를 차별하면 어찌 되겠니?” 했다.
“엄마!”하며 아들은 부드럽게 날 부르고는, “할머니는 그냥 그 시대 문화에 충실했던 거예요” 한다.
난 잠시 그 문화에 충실하다는 말에 당황스러웠다. 그리도 무던한 초등학교 딸아이가, 할머니가 너무 한다고 울면서 말하던 모습과 대학생 때 할머니를 모시고 캄보디아에 여행 후, 할머니랑 한방을 썼던 딸아이가 “엄마, 너무 힘들었어, 뭐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얼마나 심하게 하던지” 하여, 내 가슴이 철렁했던, 그때, 딸을 보며 ‘내가 참 어리석구나’ 했던 기억이 났다.
“문화에 충실하다고?”
“그럼요, 그건 할머니가 그 시대의 문화 정신을 그대로 반영해서 보여준 거라고요. 지금 엄마는 엄마 시대의 문화정신으로 바라보는 것이고요”
집에 돌아와 저녁에 남편에게 “여보 아들이 그러데, 당신 엄마는 그 시대 문화에 충실했다고, 남아선호 사상의 문화에 말야”. “허 고놈이 그래도 할머니 손에 자랐다고, 그런 말을?”
“그러게 딸이 그 말을 들으면 펄쩍 뛰겠네”
딸은 지금도 할머니를 닮았다는 말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 문화에 충실한 할머니로부터 받은 그 보이지 않는 상처로 인해서. 아들 말이 맞는지 모른다. 나의 할머니도, 나의 엄마와 남편의 엄마도 문화에 충실하여 남성을 언제나 한결같이 삶의 기준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충실한 혜택을 한 껏 받은 사람은 쉽게 문화와 시대정신을 말하며 한쪽 눈을 감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시대정신에 깔린 사람들, 외면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만이 그 문화를 부수어 버릴 수 있음을, 아직 십 대인 아들과 얘기하며 깨닫는다. 아직도 먼 길을 가야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