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딸 얻었다 생각해요.”

딸 같은 며느리 1

by 정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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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월, 나의 상견례는 성에 낀 유리창 너머 풍경처럼 멀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인생에 한 번 앉았던 자리여서 그런지, 딸의 상견례를 한 후 기억을 더듬으니 유리창 성에가 녹듯 기억이 살아났다. 정중한 인사와 어른들의 말씀이 떠올랐다. 남편과 나는 편을 가르듯 부모님과 앉아 철없이 행복한 마음을 풀어놓고 있었다. 집의 첫째 자식이었던 남편과 넷째였던 나로 인해 부모님들의 경험치는 달랐다. 두 언니와 오빠를 결혼시켰던 우리 부모는 아들과 딸 결혼의 다름을 경험했고, 서울 사위와 충청도 사위의 다름과 차이를 안 후였다.


시아버지는 “잘 키우신 딸을 저희 집에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란 말로 인사를 하셨고, 시어머니는 “예쁜 딸 얻었다 생각해요.”하며 운을 떼었다. 아버지는 “부족한 게 많고 아직 배움을 끝내지 않을 딸(석사 2년 차)이라 걱정스럽네요”했다. 엄마는 말을 아꼈다. 부모님들은 차분하게 결혼 날자와 장소를 상의하셨고, 날자와 장소를 정하시곤 집안의 다른 자식에 대한 소소한 정보를 나누었다. 성에 낀 유리창 너머 같은 상견례 자리였지만 시부모님의 말은 내게 녹지 않고 남아있었다. “딸을 저희 집에 보내주신다”는 말과 “딸 하나 얻었다”는 말.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순조로웠다. 큰소리, 마음 다치는 소리 없이 우리는 결혼했다.


결혼 후, 궁금함이 많은 시부모님은 일주일에 두세 번 안부 전화를 당부하셨다. 별일 아니라 생각했고, 별일 아닌 것처럼 안부전화를 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나의 몫이었다. 별 내용 없었다. 무슨 대단한 내용이 있을 수 있겠나? 그냥 소소한 내용이었다. 아침은 먹었는지, 옷은 잘 챙겨 입는지 등. 석사 2년 차였던 나는 아침에 남편 차로 학교에 출근한 후 퇴근하는 남편 차로 집에 왔다.


임신을 하니 궁금함이 많은 시어머니가 전화를 일처럼 했다. 집으로, 연구실로. 초등학교 교사였던 시어머니는 아침에 출근하여 오늘 아침은 뭘 먹었는지 묻고, 점심식사 후 묻고, 퇴근 전 몸은 어떠냐고 물었다. 말의 핵심은 한결같았다. 네가 잘 먹어야 아기가 잘 자라고, 네가 건강해야 남편이 편안하다는 말이었다. “딸을 저희 집에 보내주신다”는 말과 “딸 하나 얻었다”는 말의 의미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새겨졌다. 그 말이 ‘대를 잇게 하고, 아들을 보살필 여자를 얻었다’는 의미임을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반복적으로 각인됐다.


출산을 한 달 남겨놓고는 전화벨 소리가 입덧처럼 불편했다. 입덧 없던 내게 전화벨은 입덧 보편의 법칙이 적용됐다. 그래도 전화를 받아 들곤 조곤조곤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딸이 싫은데 조곤조곤 대답할까’ 싶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엄마라서 예를 갖췄다.


효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님을 나는 안다. 효는 자식이 부모에게 행하는, 거스르는 사랑임을, 부모의 삶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남편의 부모는 몇 번 보지도 못했는데, 그 효를 남편을 통해 얻으려 하지 않고, 정이 쌓이기도 전에 내게 얻으려 한다는데 있었다. 받지 않은 사랑을 어찌 거슬러 줄 수 있을까? 그게 어찌 가능하다 생각할까? 그러나 난 그것을 행하던 부모 아래서 20년을 넘게 자랐고, 효라 불리는 행위를 봐 왔고, 어른들께 하는 예를 채득 한 후였기에 '아'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남편은 한껏 소심해져 미안한 얼굴로 말했었다. “엄마는 궁금하면 그걸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야. 당신이 좀 이해해줘.” 그리곤 엄마의 잔병치레 히스토리를, 자식이 둘인 엄마가 몸이 약해 한의사가 탄식을 했었던 이야기며, 아는 스님이 오래 살기 어렵단 말을 하기도 했었다는 말로 그 시간을 모면하려 했었다. 그 당시, 나는 전화벨 소리에, 입덧처럼 울렁이던 가슴속 불편함을 참으며 수화기를 들고 맘을 추슬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말이다.


딸을 낳고 친정에서 한 달 산후조리를 받았다. 엄마는 모유 수유를 하던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해줬다. 수술 후라 잘 못 움직였던 나를 위해 작은 소반에 정성컷 식사를 챙겨주셨다. 딸이 입을 오물거리며 젖을 찾아 “젖을 먹이고 밥 먹을까, 엄마?” 했을 때, 엄마는 딱 잘라 말했었다. “엄마 배가 불러야 젖도 잘 나오는 게야. 먼저 먹어라. 10분 만에 애 어떻게 되지 않아. 걱정 말고 찬찬히 먹고. 애는 내가 안고 달래줄게.” 했다. 할머니의 단호하고 힘 있는 말에 딸은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입맛만 다실뿐 떼를 쓰지 않았다.


산후조리를 마치고 시댁에 가니 시부모님은 손녀를 안고 딸의 배냇짓에 웃음이 가득했다. 딸을 낳고 한 달 만에 찾아뵙고 저녁 식사를 준비해 밥을 먹으려 하니 젖 먹을 때가 된 딸이 징징거렸다. 나는 식탁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막 국을 먹으려 할 때 시어머니가 “애 젖먹이고 먹으렴. 애 배고파 죽겠다.”했다. 나는 저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아~ 네. 그럴게요.”하곤 밥상 차리느라 간만에 움직여 고픈 배를 잡고 딸에게 갔다. 딸은 젖을 물고 똘망똘망 나를 바라봤다. ‘이래서 어른들이 딸이 태어나면 서운했겠구나. 이래서 딸을 저희 집에 보내줘서 감사했겠구나. 이래서 딸 하나 얻었다 생각하며 기뻐했겠구나.’ 했다.


시부모님이 과한 분들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전통적인 분들이다. 그러나 내가 느낀 부모의 모습이 어쩜 이리 극명하게 다른지 그때부터 알기 시작한 것 같다.


둘째를 낳고 교사를 은퇴하신 시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해주신다 할 때 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아들이 젖을 달라 울어도 난 밥상에서 밥을 먹었다. 시어머니가 애 배고파 어찌하냐 했을 때 내가 나직이 시어머니께 부탁을 드렸다. “어머니, 우유를 먹이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잘 먹어야 젖이 잘 돌죠. 10분 기다린다고 큰일 나지 않아요. 어머니가 좀 안아주세요. 저 밥 먹을 동안.” 했다. 시어머니는 날 빤히 쳐다보곤 적잖이 당황하시다 애를 안았다. “아이고 배가 고파? 엄마가 먹어야 너도 잘 먹지. 좀 기다리란다.” 시어머니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자를 안고 말을 했다.


제도 교육으로 평등을 가르치고는 불평등한 가족관계를 유수한 한국문화라 치장하는 일도 지치는 일이다. 딸을 저희 집에 보내주신다거나, 딸 같이 여기겠다는 마음을 이제는 갖지 않았으면 한다. 아들과 결혼한 며느리이던지, 딸과 결혼한 사위던지 그들에겐 딸처럼, 아들처럼의 선언이 아닌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가 알아가고 존중할 시간 말이다.


거스르는 사랑인 효는 힘든 일이다. 힘든 일이나 너무도 소중한 일임은 분명하다. 효를 행함은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을 걸고 자식에게 내려준 사랑을, 힘들고 고통스럽게 주었던 사랑을, 준 것의 반이라도 되받고 싶은 사랑(효)이라면, 먼저 거스를 수 있는 친 자식에게 원해야 하지 않을까? 부모들도 안다. 효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서 자기 자식이 아닌 '딸 같은 며느리'에게 '아들 같은 사위'에게 효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효를 행하는 것이 너무 힘들기에 말이다.


딸의 상견례를 하고 나선 나를 반성했다. 딸과 아들은 어느 곳에서나 내 삶과 존재를 투영하는 존재일 터인데 너무도 전통적인 행동양식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해서 말이다. 풍속으로, 효도라고, 나로부터 배운 습관과 관습을 말이다. '나 하나만 잠시 고생하면 되지, 이번 한번 맘을 접으면 되지.' 하는 수많은 순응적 행동이, 평등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보이는 보이지 않는 판별 없는 행동이, 딸과 아들에게 부지불식간에 존재적 투영으로 대물림되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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