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같은 며느리 5
육아와 함께 한 직장생활! 참 힘들다. 친정부모가 아이를 돌봐주어도, 아이를 데려와 함께지내도, 육아와 병행하는 직장생활은 정말 힘들다. 돌이켜보면 오래전 일인데도, 친정엄마 품에서 나와 헤어지며 "엄마~엄마!" 하며 울던 딸과 종일 놀이방에서 꽹한 눈으로 날 기다리던 딸의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눈이 붉어진다. 그렇게 오래전 일인데도 사진처럼 맘에 박힌 딸의 모습은 지금도 슬픔의 큰 파동을 일으키니 말이다.
23년 전 내가 근무한 대전 의류업체는 퇴근이 7시였고 토요일도 오후 4시까지 일하던 곳이었다. 아이를 돌보며 직장생활을 하기엔 근무 시간이 길어 친정 엄마가 딸을 봐주겠다 나섰다. 두 살 된 딸이 순하긴 하였지만 허리디스크 수술을 한 친정엄마는 작심을 하고 딸을 데려갔다. 레지던트 수련의 과정이던 남편은 한 달에 두어 번 집에 들렀으니, 우리 세명은 각기 다른 공간에서 힘들었다.
세 살이 된 딸은 일요일 저녁이면 눈치를 봤다. 월요일 아침이면 엄마가 연기처럼 사라지니 일요일 저녁이면 놀다가도 자꾸 나를 바라봤고 잠 잘 때도 내 옷자락을 잡고 잤다. 아침드라마와 저녁드라마를 친정엄마와 보던 딸은 "TV에 나온 젊은 여자를 보고서는 TV를 붙들고 엄마라며 눈물을 쏟았다." 했다. 할머니 등에 업혀 시장에 가면 딸은 걸어오는 젊은 여자만 봐도 "엄마, 엄마~"라 불러, 친정엄마는 "어린것이 얼마나 엄마가 그리우면 그럴까 싶다."며 흘리듯 말을 했다.
세살이 넘은 딸을 대전 집으로 데리고 와 요즘말로 독박육아를 시작했다. 앞동 놀이방에 아침 7시가 조금 넘어 딸을 맡기곤 저녁에(7시 30분이 넘어) 딸을 안으면 하루가 그리 짧을 수 없었다. 너무 긴 시간 좁은 아파트를 배회하며 날 기다린 딸의 눈은 꽹했다. 몇달을 주저하다 패턴 담당 실장님께 근무시간을 조정해 달라했다. 8시 30분 출근을 9시로, 7시 퇴근을 6시로 말이다. 실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이 날 불렀다.
의류회사라 사무직을 제외한 생산라인은 대부분 재봉사들이었다. 재봉사(모두 50대의 아주머니 들이셨고 간간이 40대 아줌마가 있었다.)들은 아침 출근하여 점심까지 휴식 없이 재봉틀을 돌리고 오후 3시, 30분 휴식을 취한 후 시계가 7시를 가리켜야 재봉기를 끄던 시절이었다. 재봉틀을 켜고 끄는 시간은 시계 같이 정확했다. 그분들의 성실함과 인내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모른다. 놀라운 봉제 실력은 탄성이 절로 나왔고, 무거운 가죽옷(모터사이클 전문가용 오버롤)을 봉제하느라 온 몸을 써서 어깨부터 허리까지 아프지 않을 곳이 없을 터인데도 좀채 병원 가는 법이 없었다. 사무직이야 그렇다 치고라도 고단한 노동의 세월을 간직하며 말없이 재봉기를 돌리는 아주머니들을 보며 시간 단축을 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 사무직 직원들은 잔업이 일상이었다. 유럽 바이어와 소통을 하던 영업직이야 시차에 의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다른 부서의 직원들도 8시나 9시가 돼야 퇴근했다. 미혼 여사무직원들도 잔업을 했고 두 명의 기혼녀인 자재과 계장님(회사 1분 거리에 집이 있었다.)과 나만 7시 칼퇴근을 했다. 그런 분위기의 회사에서 시간 배려를 해달라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장은 한 참 내 사정을 듣고 "시간을 빼 줄 터이니 일은 문제가 없도록 하세요." 했다. 감사한 일이었다. 캐드실(패턴 CAD)을 준비해 놓고도 일 년 이상 적임자가 없어 새 장비들이 방치되었던 상황이어서 사장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넓지 않았다. "안된다." 하면 그만인데 사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 후 급한 일이 있으면 딸을 찾아 다시 회사로 갔다.
딸은 한 달에 한번 이상 회사에서 시간을 보냈다. 딸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알록달록한 가죽 쪼가리들을 갖고 놀았다. 딸이 놀고 있는 동안 나는 급한 패턴작업을 하거나, 수정된 작업지시서를 중국 공장에 팩스로 보내거나, 급한 유럽 바이어 샘플 작업을 체크하거나, 전화로 유럽 바이어와 일정과 샘플 작업 문제 등를 논의했다(그 당시 국제전화는 꾀나 비싼 요금이 나와 회사에서만 통화를 했다). 잔업중이던 직장동료들은 딸이 참 순하다며 예뻐했다. 오가다 마주친 사장님과 이사님은 손녀뻘 되는 딸을 보곤 사탕과 과자를 주며 머리를 쓰담어주었다. 참 다행이었다.
그 시절 시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면 늘 보지도 못하는 남편이 잘 있냐고 묻고는 딸이 감기가 들었는지, 밥은 잘 먹는지, 묻고 또 물었다. 가끔 보는 남편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감기에 걸린 딸이 밥을 잘 못 먹고 있어도 "잘 놀고 잘 먹고 있어요."하고 말씀드렸다. 거짓을 말하려 한 것은 아니되 있는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그러게 집에서 애 잘 보는 게 돈 버는 거지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란 말씀이 또 따라올까 말을 아꼈다.
딸과 시댁을 가면 손녀를 안고 재롱에 기뻐하다가도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지나가듯 말을 던지셨다. "집에서 애 잘 보는 게 돈 버는 거다!" 명절에 대전 마트에서 시장을 봐 천안 시댁에 가면 시어머니는 추석이건, 설이건 달걀 한 판만을 사다 놓고 냉장고를 비워두셨다. 시댁에 도착해하는 일은 냉장고를 채우는 일이었다. 부엌에서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고, 냉장고를 채워 놓고 나면 "고생했구나." 한마디와 함께 또 따라왔다. "집에서 살림 잘하는 게 돈 버는 거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시간을 보냈다.
남편의 월급이나 나의 월급이나 그 시절 큰 차이가 나지도 않았고, 남편이나 나나 고생의 정도가 모두 각자 삶의 길을 따라 훈련하는 시기였음에도, 나의 일은 단순히 돈 버는 일로, 작은 돈을 벌기 위해 아이를 희생시킨다는 그 한마디로 응축되었다. 남자와 여자를 빼면 나와 남편은 배운 대로 자신의 길을 가며, 배우고, 익히고, 교류하고, 성장하고, 주어진 책임을 완수해 나가는 것일 뿐인데, 남편은 당연한 직업으로, 나는 아이를 배려하지 않고 돈 버는 일에 매달리는 것으로 간주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맘과 귀에 거슬렸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고 말이다.
시어머니는 고교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신 분이었다.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힘들게 교편생활을 하였는데, 정작 며느리가 일한다 하니 불만이셨다. 아들의 전문의 과정이 끝나면 넉넉하게 지낼 수 있는데, 집에서 손녀나 잘 돌보면 좋지 않나 말끝마다 "애 잘 보는 게 돈 버는 거다."란 말을 하셨다. 남편 말에 전해 들은 몸이 그리 약하신 시어머니는 왜 애를 맡겨가면서 직장생활을 하였는지 나는 묻고 싶었다. 집에서 애를 잘 돌보는 일이 소중하지 않다거나 직장생활만이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거나 할 생각은 없다.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각자가 선택하는 삶이 그 얼굴 모양만큼이나 다양하니 무엇이 그르다 옳다 할 수 없음을 그때도 지금도 알고 있고, 그때나 지금이나 과정을, 인생을, 나의 선택을 존중받고 스스로 존중하고 살고 있을 뿐인데 그분들은 끝없이 내게 자신들의 생각을 주입시켰다.
옷 만드는 일이, 패턴을 뜨는 일이 좋았다. 종이에 그려진 디자인을 실제 의복으로 구현하는 일이, 섬세한 구조화 작업이 즐거웠다. 대전에서 일하는 팔십여 명(세일즈 샘플실과 사무직)의 사람들과 유럽의 디자이너를 거쳐 중국의 천여 명 노무자들과 옷으로 만나 유럽 소비자를 만나는 것이 흥미로왔다. 모두가 옷 하나로 연결되고, 각자의 일을 하며, 다른 듯 비슷한 삶을 산다는 것이, 옷을 통해 눈을, 생각을 넓혀주는 작업 좋았다. 동시대에 함께 땀 흘리고, 지역을 넘어 연결되고, 시간을 통해 성장함이 좋았다. 시부모님과 같은 선생님들이 가르친데로 '인생을 살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부여하며 자아성취를 위해 매진함'이 좋았다. 배우신 시부모님은 직장생활이던 배움의 과정이던 나에게 "애 잘 보는 게 돈 버는 거다!"라 말했고 친정부모는 "너는 뭐라도 할게다. 참 끈기 있다."며 "힘들어서 어쩌니." 했다.
1995년에 결혼해서 2006년에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에 자리를 잡았으니, 딱 11년을 남편이 아프고, 애들이 아프면 그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애 잘 보는 게 돈 버는 거다! 집에서 살림 잘하는 게 돈 버는 거다!"
신기하게도 대학에 자리를 잡고는 한 번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에겐 어린 딸을 키우며 일하던 20여 년 전 의류회사 패턴 작업이나 지금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나 모두 새롭고 배우고 성장하는 일일 뿐인데 말이다. 변하지 않은건 아직도 명절엔 시어머니가 냉장고를 비워놓고 계란 한 판만을 사다 놓으시지만 말이다.
채용됐다는 소식을 듣고 시어머니께 제일 먼저 전화를 드렸다. "어머님이 도와주셔서 채용됐어요." 했을 때, 시어머니는 "내가 뭐 한 게 있니, 네가 열심히 해서 그렇지." 하셨다. 시어머니가 왜 한 게 없나? 끊임없이 "애 잘 보는 게 돈 버는 거다. 집에서 살림 잘하는 게 돈 버는 거다!" 란 말로 내가 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 시어머니도 모르게 생각하도록,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지 않도록 자극하고 격려했는지 시어머니는 모르시는 게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의 정체성과 목표가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였으니 말이다. 돈 버는 것이 아니면 나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지 늘 생각했다. 정말 고마우신 분이다. 늘 까먹지 않게 잊을 만하면 가시처럼 말하여 준 것을, 시부모님이 망각했을 뿐이다. 그분들이 학생들에게 자아성취가 중요하다 가르친 그 가르침을 내가 따랐을 뿐임을 말이다. 시부모님은 내가 가장 힘든 시기마다 노자의 섭생(攝生)의 미덕을 몸소 보여주시기 위해 애쓰셨음을, 이리 시간이 지나 깨달았으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노자는 자신의 생을 너무 귀하게 여기면 오히려 생이 위태롭게 될 수 있고, 자신의 생을 억누르면 생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며 귀생(貴生)과 섭생(攝生)을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