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같은 며느리 6
22년 전 딸을 데리고 직장생활을 하던 때 시부모님께 안부전화를 하면 수련의 과정이던 남편이 자주 집에 오는지 물었다. "가끔 밤에 와서 옷가지를 가지고 새벽에 가요." 하면, "힘들어서 어쩌니~" 하시며 지나가듯 "그렇게 해서 언제 둘째를 갖냐, 그러다 애 낳을 때를 놓칠라!" 하셨다. 시어머니가 명예퇴직을 하곤 자주 전화를 했다. 딸아이가 어찌 지내는지 묻고는 슬그머니 또 물었다. "둘은 있어야 첫째가 외롭지 않지!" 하며 "아들이 아니라도 둘은 있어야지. 둘째는 안 갖냐? 언제 가질 예정이냐?" 했다. "예, 어머니, 둘은 있어야죠. 그런데 남편을 볼 수 있어야죠." 하니, 시어머니는 헛헛하게 웃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이를 낳는 것도, 키우는 것도 힘들지만 딸 혼자 노는 모습은 맘에 걸렸다. 두 언니들 모두 둘(아들, 딸)을 낳아 힘들게 키워도 그 모습은 부럽고 좋았다. 친정아버지는 "남의 집 대를 끊으면 안 되지, 힘들어도 며느리 된 도리를 해야지." 했고, 옆에서 듣고 있던 엄마는 "그럼, 그게 우선이지. 하나 갖고는 안되고 말고. 다 때가 있지." 했다. 어려서부터 듣던 아들 타령을 결혼하여 시댁과 친정에서 한꺼번에 들으니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지만 '자매던, 남매던 둘째를 가져야겠다.' 일단 맘만 먹고, 맘만 준비했다. 그때는.
회사에 일이 물밀듯 들어왔다. 가죽 전문 모터사이클복(MC복) 회사가 텍스타일 MC복을 만들기 시작하자 유럽 바이어들이 내 집인양 회사에 들락였다. 그만큼 패턴 작업이, 샘플 작업이 많아졌다. 일이 점점 몰려들자 경력 20년 차 패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본인은 가죽만 전담할 터이니 텍스타일 패턴사를 뽑으라 발을 뺐다. 난이도 낮은 가죽 패턴과 그레이딩 작업을 하고 있던 내게 실장은 "텍스타일 패턴 작업을 해보겠냐?" 물었다.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하겠습니다." 했다. 일 할 때였다.
실장(실장은 패턴팀 관리와 일본 바이어 영업을 병행했었다)은 유럽 디자이너와 샘플 수정을 논하다 의사소통이 막히면 캐드실로 왔다. 유럽 디자이너는 패턴 수정을 보고 싶어 했고 그들이나 나나 영어는 제2외국어였으니 눈치 볼 것 없이 단어를 나열하며 패턴 수정과정을 논의했다. 얼마 안 있어 실장은 작은 규모의 바이어(네덜란드 MC복 Revit: 후발주자인 이 브랜드는 현재 유럽에서 MC복으로 유명한 회사가 되었다. 회사 사장이 동갑내기여서 중국 현장에서 늦은 밤 술 마시며 인생을 논했으니. 참 재미있다.)를 상담하겠냐 물었다.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하겠습니다." 하고 나섰다. Revit 사장과 상담을 하며, 의복을 체크하고, 부자재를 추천하고, 패턴 수정을 제안하며, 단가를 확정하고, 생산 일정을 조정하는 일은 새롭고 배울만한 일이었다. 그들도 새롭게 텍스타일 MC복을 만드는 것이니 디자이너나 나나 모두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 풍부한 의견 교류를 통해 제품을 개발했다. 그렇게 나는 패턴을 뜨며 영업 관련 업무에 발을 들였다. 일을 탐낼 때였다.
새로운 일로 하루하루가 날마다 도전이었는데 서울 패턴 전문 학원(구:서울모델리스트 아카데이, 현재: 씨앗 패턴 학원) 실장이 전화를 줬다. 친정집인 조치원 인근 전문대에서 패턴 캐드와 그레이딩 강사를 찾는데 경력과 학위가 있는 강사를 찾을 수 없어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었다. 토요일까지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시절,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싶었지만 학과 학과장이 전화를 했다. 컴퓨터 40대를 구매하여 캐드실을 구축했는데 강사를 못 구해 수업을 통으로 날리게 생겼다며 토요일 수업도 가능하니 회사에 양해를 구해 강의를 맡아달라 사정하였다. 학과장의 급한 맘이 느껴졌다.
이미 딸을 데려와 출, 퇴근시간을 조정한 후였다. '어찌 말을 꺼낼까?' 했지만 텍스타일 패턴과 영업일을 잔뜩 안겨준 실장에게 토요일 출강이 가능한지 여쭈었다. 실장은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멍하니 봤다. "실장님! 여기도 일 년 넘게 캐드실이 비어있었잖아요. 사람이 없어서요. 기회를 주시면 일처리는 문제없도록 할게요. 사장님께 잘 말씀해 주세요." 했다. 실장은 "글쎄~ 그게 쉬운 일이 아닌데~ 한 시간 빼는 게 아니라 아예 통으로 토요일을 빼야 하니까. 될까 모르겠네. 여하간 해봐야지요, 해봅시다." 했다.
그 당시 회사에는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곤 전직 영어 선생님이시던 이사님(초기 무역서류 작성과 의사소통 담당)과 영업과장과 신참 무역부서 여직원(인보이스 작업과 급한 선적 관련 영어 통화담당) 외에는 없었다. 전직 선생님이셨던 이사님은 늘 오후가 되면 유리로 둘러싸인 회사 한 편의 캐드실에 들려, 내가 타 드린 달달한 믹스커피와 에이스 과자를 드시며, 플로터에서 직-직~ 소리 내며 출력되는 수많은 패턴을 구경했었다.
오전에 실장님께 운을 떼었는데 오후에 이사님이 커피를 드시러 오셨다. 달달한 커피를 드시며 작은 목소리로 "남을 가르치는 일은 참 좋은 일이지, 새로운 분야를 가르치는 것이야 말로 즐겁기도 하고, 지금이야 그렇지만 나도 영어를 가르칠 때 좋았지!" 했다. 부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조용한 목소리로 업무를 지시하고 체크하던 이사님은 캐드실에서만은 지시가 아닌 휴식을 취하셨고, 이사님과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누는 사람은 다름 아닌 사장이었다.
며칠 후 사장이 불렀다. 사장실에 들어가니 재무과 부장님이 회계장부를 펼치곤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사장은 "이따 다시 봅시다, 좀 안 맞네, 계산이." 했다. 수리에 밝은 사장이 나를 보며 응접실 자리를 권했다. 차를 권하며 사장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싶다고? 토요일에?" 했다. "네 친정집 근처 전문대학인데 패턴 캐드 강사를 구한답니다. 석사를 하고 캐드 경력이 있는 강사가 없어 수소문을 하다 제게 연락이 왔습니다. 허락해 주시면 해보고 싶습니다." 했다.
사장은 녹차를 마시며 "자네 참 이상해. 남편이 의사라면서. 집에서 딸 키우며 몇 년 있으면 편하게 지낼 수 있는데 그리 고생을 사서 하나?" 했다. "저는 저고 남편은 남편이죠. 재미있습니다. 일이."하고 대답하니 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저는 모터사이클복을 이곳에서 처음 봤습니다.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어요. 본적도 배운 적도 없는 옷을 만들어 전 세계에 수출하시니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했다. 사장은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은 어떻게 이런 특수복 만드는 회사를 세우셨어요? 일본, 유럽, 미국 바이어까지, 그게 전 궁금합니다."
나의 질문에 사장은 추억을, 젊은 시절을 풀어놨다. "집안이 가난하여 가죽 공장 시다로 들어갔지." 사장은 장부정리와 회계담당 업무를 하며 돈을 모아 망해가던 가죽 공장을 인수했고, 가죽제품 중 일본 소비자 대상 MC복을 만드는 회사를 시작으로 수많은 난관과 고난을 이겨 지금에 이르게 되었음을 말해주었다. 사장의 눈이 빛났다. 한 시간이 넘게 자신의 삶을 요약정리하듯 말하여 주고선 "토요일에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잘 가르쳐보게, 일은 지장 없어야 하네." 했다. 그렇게 난 의류업체를 다니며 대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새로운 일을 할 때였고 기회를 얻고 기회를 만들어 잡을 때였다.
시부모님은 대학 강의를 하게 됐다는 말에 "강의만 하고 둘째를 가질 준비를 하면 어떻게냐?" 했다. 일에 치여 아이를 낳지 않을까 전화통화 때마다, 딸과 함께 시댁을 올라갈 때마다 "애 가질 적기"와 "애 낳을 때" 타령을 하셨으니 말이다. 친정엄마는 "몸이 너무 힘들면 애가 서겠니? 터울이 너무 지면 힘들다. 키우기도 어렵고, 너도 어렵고." 했고, 친정아버지는 "시집을 갔으면 대를 이어야지, 그게 첫 번째 의무고 도리다. 다 때가 있으니 놓치지 마렴" 했다. 양가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애 낳을 때'를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부모님들이 하신 말씀은 자식을 걱정하는 순수한 말들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속에 가부장 문화의 폭력성이 기세 등등하게 살아있던 시절'이 아닌가 한다. '애 낳을 때'이건, '일 할 때'이건 최적의 조건은 '내가 하고 싶을 때'인데 어른들은 그렇게 조바심을 냈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서른 된 조카를 만나 "너는 언제 결혼하려고 그러니, 그러다 때 놓친다." 말해놓고 스스로 놀랐다. 문화는 무섭다. 부지불식간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은 정말 무섭다. 내가 살며 '내 때는 내가 정하는 것이라 늘 속으로 다짐'하며 그분들의 '때 론'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놓고는 내가 '때, 적기' 타령을 하니 말이다. 어느 미래에 딸과 아들에게 '일할 때', '아이 낳을 때'를 말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생각을 조심하고, 말을 조심하고, 나의 과거를 조심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사랑하는 딸, 아들! 너희들의 때는 너희들이 하고 싶을 때가 최적이니 그때를 잘 찾았으면 하는구나! 나의 세대는 가족, 의무, 엄마의 희생과 사랑이란 미명 하에, 힘든 직장생활에도, 힘든 육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애 낳을 때와 아들 낳아 대를 잇는 타령에, 내가 원하는 때를, 일을, 버려야 될 것 같은 정신적 고통과 희생 정신없는 엄마이며 도리를 다하지 않는 며느리인 것처럼 가슴속에 죄의식을 키우며 살았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던 안 하던, 애를 낳던 안 낳던, 일을 죽기 살기로 하던 취미처럼 가볍게 하던, 그 모든 적기는 내가 원할 때임을 뒤돌아 나를 따라가다 보니 보이는 구나.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5월 초였던 딸의 결혼이 연기됐다. 딸과 미래 사위가 찾아와 일정을 상의하던 중 우리 부부가 9월이 어떤가 하였더니 가능한 빨리 하고 싶다 한다. 어느 때든 나의 몫은 그때에 축하하는 것임을... 딸이 원하는 때에 행복한 혼배미사를 올리기를 그저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