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같은 며느리 7
첫 딸이 네 살이 되자 시부모님 맘이 급해졌다. "아들이던 딸이던 둘은 있어야 한다."며 천안의 유명하단 한의원에 예약을 잡았다. 직장생활과 강의를 병행하며 독박 육아를 하고 있을 때이니 몸은 피곤 자체였다. 칠순을 바라보는 한의사는 맥을 잡고 "손발이 차고 아기집이 냉하니 약을 먹어야겠네." 하며, 내 눈을 바라보고 "신경이 칼날같이 예민하네~. 편안한 마음을 가지세요. 그게 중요해요." 했다. 일주일 후 시부모님이 약을 챙겨 대전집에 오셨다. 수련의인 아들 약(기력 보충)과 분명한 목적을 가진 내 약(애가 잘 들어서는 약: 이런 약이 정말 있는 것인지, 사람들이 그리 믿는 것인지 무지한 나는 잘 모르지만)을 들고 말이다. 두 분은 주의사항(삼가야 할 음식 리스트)을 챙겨며 꼬박꼬박 잘 먹으라 당부하셨다.
감사했다. 그런데 약을 받아 드니 마음은 바람 불듯했다. 약을 먹으면 애가 생길까? 혹 천운처럼 애가 생겨도 건강할까? 첫째를 수술로 낳아 둘째도 수술해야 하는데 모든 게 순조로울까? 나는 건강할까? 애가 생기면 두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자꾸 첫째 만삭 일 때 애를 낳다 죽은 남편 친구 아내가 생각났다. 34살에 '애 가질 때'라 맘은 먹었지만 막상 약을 받아 드니 처지가 쓸쓸했다. 그냥 서글펐고 한숨이 나왔다.
일주일 약을 먹으니 졸렸다. 일을 못 할 정도로. 일이 늘어 몇 개월 전부터 네 명의 후배(패턴 관련 업무 1명과 그레이딩 업무 2명, 영업 업무 1명)를 데리고 업무를 보던 때여서 잦은 회의와 작업 진행을 체크해야 하니 내가 한약을 먹고 졸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삼시세끼 약을 먹다 이주일 차엔 저녁에만 약을 먹었다.
2개월이 지났을까 둘째가 생겼다. 약을 다 먹지도 않았는데 애가 생겼다. 저녁마다 먹던 약도 3주 지나 먹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냥 저녁은 딸과 놀았다. 먹고 싶은 것 해 먹고, 조그만 딸 손을 잡고 아파트 상가를 돌아다녔다. 유아복 매장에 들어가 딸과 함께 귀여운 신발이며, 손 싸개며, 턱받이를 구경했다. 시부모님의 정성 가득한 한약 때문인지, 딸과 편안한 저녁시간을 보내서인지 둘째가 천운처럼 왔다. 물론 남편 노력이 첫째일 테지만 애를 갖겠다 작정하고, 소망하고,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데 선물처럼 왔다.
회사는 몇 개월 더 일했으면 했지만 후배들을 믿고 퇴사했다. 그들의 책임감과 협업을 나는 믿었다. 그 뒤로 몇 번 업무 관련 전화를 받았지만 회사는 날로 번창했다. 이때 깨달은 것은 회사는 사람 하나 없다 하여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게다. 조직이 왜 조직이겠는가? 수많은 직원이 그물망처럼 연결돼 있어 한 사람 없다고 쉽게 문제 되지 않는다.
임신테스트기에 두줄이 선명이 생겼을 때, 남편에게 "진짜 둘째가 생겼네. 기쁘네. 애를 갖으려 작정했는데 안 들어서면 어쩌나 했는데." 했다. 남편은 "잘 됐다. 정말. 그런데 걱정이네~. 당신이 또 수술을 해야 하니." 하며 한숨 섞인 말을 했다. "나이가 있고 첫째를 수술해서 자연분만은 어려울 거야." 남편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죽기 아니면 뭐 더 있겠어? 여하간 어여쁜 둘째가 생기잖아. 그거면 일단 성공이지." 했다. 남편은 죽는다는 말에 펄쩍했다. 내가 "아니 근데 둘째가 딸이면 어머님과 아버님이 더 낳으라고 하는 거 아냐? 아들에 대한 집념, 알잖아?" 하니, 남편은 "걱정 마 그건, 당신 나이도 있고 엄마세대도 다들 대여섯 낳는데 힘들다고 둘만 낳았으니 당신한테 차마 그렇게는 못할 거야. 그냥 편히 좀 쉬어, 일단." 했다.
임신 5개월, 남편 선배인 부인과 교수가 초음파를 보며 "고 녀석 아빠 닮아 이마가 넓고 잘생겼네." 했다. 친한 선배 교수는 옆에 있던 남편을 보며 "첫째가 딸이랬지? 어머님이 좋아하시겠다!" 했다. 진료 후 남편이 싱글벙글 웃으며 "선배가 아들인걸 광고하네." 했다. 내가 "뭐가 보인다고 그래? 내가 보니 그냥 작은 애 구만!" 하니, 남편은 "다 보이던데? 이제 됐다. 셋째를 낳으라고는 안 할 거야." 했다. 내가 "다행이네. 어머님, 아버님이 좋아하시겠네, 그리 기다렸으니." 하며 남편 눈을 보고 "첫째는 내가 키웠으니까 둘째는 당신이 키웠으면 해, 여보!" 했다. 수련의 3년 차인 남편은 기쁜 눈으로 "그러지 뭐, 뭐 어렵겠어!" 했다. "일단 모유 수유하고 당신 전문의 딸 때까지는 내가 돌보지만 전문의 끝나고 당신이 하면 되겠네. 기저귀도 빨고 삶고, 젖병도 씻고 삶고, 아기 옷도 정리하고 말이야. 당신이 너무 해본 게 없으니 둘째 때는 해봐야지." 나는 조간 조간 말했고 남편은 들뜬 기분에 "그래야지. 걱정 마, 잘 낳기만 해. 내가 다 알아서 키울게." 했다.
수술로 둘째를 낳고 모유수유를 했다. 낮밤이 바뀐 아들이 한 달 이상 새벽 4시까지 눈을 반짝여 산후조리는 쉽지 않았다. 아들이 1월에 태어나 산후조리 겸 방학을 보내고 3월에 강의와 패턴 개인교습을 했다. 집 근처 사무실을 얻어놓고 모유수유를 하곤 사무실에 잠깐씩 나와 일을 했다. 인품이 넉넉한 돌봄 아주머니가 이른 아침에 오셔 아들과 딸을 하루 종일 챙겨줬고, 나는 돌봄 아주머니와 사무실 운영비용을 댈 정도 돈을 벌었다.
아들 돌잔치 후 남편은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로 취직했고, 나는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친정부모님이 남편 취직 축하 겸 가족모임을 하자 하셔, 우리는 젖병과 기저귀, 애들 옷가지를 챙겨 조치원 집에 갔다. 언니들은 아들을 보고 "아빠 붕어빵."이라며 귀여워했다.
저녁 식사 자리서 내가 부모님과 식구들에게 "첫째는 내가 키워서 둘째는 아빠가 키울 거야. 우유도 기저귀도 모두 아빠가 하기로 했어." 했다. 친정엄마와 아버지는 그저 농담인 줄 알고 웃고, 언니들은 "야, 그게 말처럼 쉽냐? 이제 대학병원 교수로 직장 생활하기도 어려운데, 네가 해야지. 너는 지금 강의만 하고 있잖아?" 했다. 나는 "언니들은? 나도 직장 생활하며 딸 혼자 키웠어. 그리고 이제 박사과정 들어가서 공부해야 되고, 아빠라고 왜 못해? 하기로 했으니까 해야지. 심청이 아빠도 육아 대디였는데 못할게 어딨어?" 하니 언니들은 "야~ 심청이는 엄마가 없었으니 젖동냥하며 키운 거고, 너는 멀쩡이 살아있으면서 힘든 일 하는 사람한테 왜 그러니?" 했다. "언니 이 사람은 육아를 몰라, 딸이 어떻게 자랐는지 모른다니까?" 내가 옆에 있던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 딸이 어떻게 컸는지 알아?" 했더니, 남편은 순진한 눈으로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했다. "대여섯 낳는 것도 아닌데 배워야지, 인생 뭐 있어? 자식 자라는 것 보며 깨우치는 게 있는데 그걸 어찌 내가 또 뺏어. 안되지." 했다. 언니들은 머리를 내두르며 남편에게 물었다. "정말 둘째를 키우기로 했어? 얘는 한다면 하는 애라는 걸 알면서 그랬어?" 남편은 웃으면서 "어떻게 되겠죠. 설마 나 몰라라 하겠어요?" 했다. 남편은 그리 쉽게 '설마'라 생각하면 안 됐다.
그날 밤 아들은 10시에 우유를 양껏 먹고 잤다. 새벽 다섯 시에 아들이 우유를 달라 칭얼댔다. 부모님을 포함하여 18명(큰 언니네 4명, 작은 언니네 4명, 오빠네 4명, 우리 집 4명, 부모님 2분)이 단독주택인 친정집에서 편안하게 자는 중이었다. 모두가 평화롭게 자고 있던 와중 나는 깨었으나 남편은 아들 울음소리에 반응이 없었다.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10분 즈음 지났을까 큰 언니가 부스스 일어나 내게 와 나를 흔들었다. 나는 깨어 있었지만 '우유는 남편이 주기로 했으니 기다려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내가 남편을 다시 깨웠다.
남편은 눈만 비비고 일어날 듯하다 다시 돌아 누웠다. 아들은 그 뒤로 다시 20분을 울었다. 둘째 언니와 엄마가 와서는 누워있는 내게 왜 우유를 주지 않냐고 물었다. 내가 "그냥 주무세요. 남편이 일어나서 줄 거예요. 걱정 말아요." 했다. 둘째 언니는 "쟤는 참!" 하고 방에 들어갔고 엄마는 "얘? 젖병 어딨냐?" 했다. 내가 일어나 "엄마! 기다려요. 조금 더 운다고 큰일 안 나요. 남편이 일어나 줄 거예요. 아직 해보지 않아서 그래요. 얼른 가서 마저 주무세요." 했다. 엄마도 내게 눈을 흘기고 방에 들어갔다. 내가 남편을 큰 소리로 불렀다. "여보 당신 때문에 온 가족이 잠을 깨잖아요. 얼른 일어나 우유 줘요. 뭐 힘든 것도 아닌데 잠을 못 깨요. 얼른요." 했다. 남편은 그제야 상황 파악을 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남편은 선잠 속에 아들 젖병을 물렸다. 그렇게 친정집 18명의 식구들 앞에서 육아 대디 신고식을 올렸다.
그 뒤로 기저귀가 차가워 애가 울어도, 배가 고파 애가 울어도, 응가를 해서 애가 울어도, 남편이 부재한 상황이 아니면 난 젖병과 기저귀를 잡지 않았다. 남편이 태워먹은 젖병이 수십 개였다. 좋은 젖병을 골라 샀으니 그 돈을 모으면 작은 명품 지갑은 살 정도였다. 내열강화 젖병을 샀지만 너무 타서 3중 바닥 솥도 몇 개를 버려야 했다. 집안에 젖병 탄 냄새가 일주일 넘게 가도 관여치 않았다. 남편은 아이 돌보기를 시작하곤 "천 기저귀를 일회용 기저귀로 바꾸면 안 되겠냐."고 내게 물었다. 여행을 가지 않는 이상 천기저귀를 썼다. 그나마 세탁기를 쓰고 손빨래를 안 했으니 그게 어딘가? 그렇게 남편은 육아 대디가 됐다. 17년 전 육아 대디가 되었으니 아빠 육아계의 선두 주자다. 물론 심청이 아빠가 있지만 말이다.
사람은, 열심히 직장 생활하던 사람일수록 착각하는 한 가지가 있다. '내가 없으면 이 회사 안 돌아갈 것이다.'라는 착각이다. 문제없는 회사라면 사람 난 자리 표가 나긴 해도 회사 무너지는 법 없다. 건강한 조직은 생물처럼 조직 내 성원의 역할 분담으로 살아남는다. 가정은 말할 것도 없다. 의지만 있다면, 자식 돌보는 일은 나의 일로 받아들여진다. 직장에서 처럼 네일 내일 따질 것도 없는, 우리 가정의 소중한 자식인데, 어찌 아빠가 아이를 키울 수 없겠는가? 나이가 어리든, 많든, 남자든, 여자든, 내가 키워야 할 자식이라 받아들이면, 잠이 부족해도,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려도, 시간에 쫓기듯 살아도, 아이를 키울 수 있다. 엄마여서 키우고, 여자라서 키우는 게 아니다. 누구나 다 키울 수 있고, 누구나 다 작심할 수 있고, 그 누가 키우든 아이가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면 그게 조직이든, 남이든, 조부모든, 한부모든, 엄마든, 아빠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언니들과 만나 애들 키울 때 얘기를 하면 언니들은 나를 쏘아보며 "얘는 참 독해, 독한 년이야." 하며 웃는다. 형부들은 방긋 웃으며 "처제는 무서운데, 그래도 예뻐, 씩씩하고, 대견하지." 한다. 남편은 "독하죠, 정말 독하죠. 장인어른이 함 들고 갔을 때 "자네 참 힘들 걸세!" 한 말을 무슨 말이지 모르고 넙죽 술을 받아마시며 웃고만 있었으니 말이죠." 했다.
두 언니들은 온화한 성품에 양보와 배려를 일상으로 한다. 그게 잘못됐다 생각지 않는다. 부부가 함께 살며 각자 감당해야 할 내용, 무게가 있겠지만 서로가 함께 하려는 자세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을까? 부부에게 있어 삶의 공유는 권리이자 의무이고, 육아는 부모에게 있어 책임과 배움 아니겠는가?
아이들이 다 자란 지금 남편과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둘째 키운 게 힘들기만 했어?" 남편은 꼼지락 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며 우유 먹던 아들을 생각하며 "글쎄, 힘들긴 했지! 근데~, 좋았어, 좋았지!" 한다. 남편이 "당신 밀라노에 있을 때, 애가 열이 나서 부루펜을 먹이고 밤새도록 안고 있었는데, 그때 왜 응급실 가서 주사 주지 않았나 싶어, 바보 같이, 안고 있다 내려놓으면 열에 들뜬 애가 칭얼대서 계속 안고 밤을 새웠는데, 참 멍청했어!" 하기에, 내가 "그러게 응급의학과 교수면 뭘 해, 배운 지식과 닥친 상황은 그리 엇박자가 난다니까? 그게 인생이고 경험이지,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아들이 성장하며 당신에게 가르쳐준 거지" 했다.
결혼을 앞둔 딸이, 아빠가 다섯 살 터울 남동생을 안고 우유를 먹이던 모습을 보고 자라 육아 대디의 산 교육을 받았으니 다행이다. 코로나 19 사태로 집에 있는 아들은 밥을 먹을 때면 아빠와 도란도란 컴퓨터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한다. 그러고 보면 육아 대디, 육아 마마 모두 참 좋은 경험, 행복한 배움이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