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같은 며느리 8
20여 년 전 직장생활은 힘든 만큼 배움도 컸다. 모터사이클복(MC복)을 수출(일본, 유럽, 미주)하는 회사였으니 해외 디자이너와 바이어에서부터 샘플실 재봉 아주머니와 재단 아저씨까지, 배울 것 천지였다. 디자이너들은 생명을 보호하는 MC복인만큼 디자인 속에 안전과 기능을 겹겹이 배치했고, 바이어들은 국제경제를 주시하며 단가를 뽑아내 사업가들은 돈의 흐름을 공기처럼 마시는구나 하는 깨우침을 주었다. 그뿐인가? 샘플 아주머니들은 1mm 오차를 허용치 않는 신기에 가까운 봉제 기술을, 재단 과장님은 기계로 찍어낸 듯한 커팅 기술을 펼쳤으니 어리바리한 나는 그분들과 옷을 개발하며 기술과 노하우와 인생 경험을 배울 수 있었다. 직장생활에서 만난 샘플실 아주머니들과 유럽디자이너들은 어린 내게 인생의 창문처럼 삶의 다양성을 엿볼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지 않았나 싶다.
새로 출력한 패턴을 들고 샘플실에 가면 아주머니는 늘 샘플 의뢰서 디자인과 패턴을 보곤 "무슨 주머니를 이리도 많이 만들어? 주머니 입구가 이중으로 커버되는겨? 참 복잡도 하다. 여그에 손 한번 늘라면 고생 좀 하것는디?"하며 다년간 만들었던 샘플 중 유사한 샘플 작업을 소환하며 진한 사투리로 작업을 논했다. 샘플실에 계시던 재단사 아저씨는 "뭔 주머니길래 그리 복잡해, 넣기가 힘들어? 내 와이프인가?" 하며 진한 농담을 해 아주머니들은 작업을 하다 일제히 아저씨를 째려보며 빵 터졌었다. 패턴 작업을 하다 작업 진행사항을 체크하러 샘플실에 들어가면 아주머니들은 "퇴근 전엔 다 되것는디?" 하며 라디오 음악을 타고 돌아가는 재봉틀 소리에 맞춰 집안일과 자식, 남편, 시부모, 친정부모의 수많은 얘깃거리들을 풀어놨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미싱 속 바늘에 걸린 실처럼 이야기는 끝도 없이 색색의 천에 자리를 잡았다. 살아가는 얘기들이 다 비슷한 듯 보이면서도 얼마나 다른지, 비슷한 듯 보이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다르게 삶을 선택하는지 그분들의 인생을 들으며 배울 수 있었다.
유럽 디자이너와 바이어들은 업무가 끝난 저녁 시간이면 살아온 얘기, 살아가는 얘기, 살아갈 얘기를 함께 나눴었다. 난 그 속에서 문화의 차이, 관점의 차이를 배웠다. 디자이너 도린(네덜란드 회사 Revit의 디자이너로 나의 퇴사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암으로 사망하여 참 슬펐다.)은 175cm의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로 얼핏 보면 남자 같아 보였지만 몇 마디 얘기를 나누면 천생 여자였다. 도린은 결혼계획 얘기(7년간 동거한 동료 영업담당 직원과 조만간 결혼할 예정이라며 얼굴을 살짝 붉히고 눈빛 가득 설렘을 품었었다.)를 할 땐 소녀 같기도 했지만 소식 쩍 연예 얘기를 할 땐 거칠 것 없는 남자 같았다. 도린은 자신의 고등학교 기숙사 시절을 회상하며 "아침에 방에서 나가는 파트너는 늘 바뀌었는데, 그게 다 술 때문이었다." 하며 박장대소를 했었다. 내가 "정말 그랬냐?" 했더니 "그게 뭐가 어때서!" 하며 "그런 경험 속에서 지금의 남편감을 골랐으니 그게 다 헛되지 않다." 자부하는 모습은 놀라움 자체였다. 과장된 얘기인지 아닌지 내 어찌 알겠는가만은 그들의 성문화와 청소년 문화가 얼마나 우리네와 다른지 배웠다.
쿨한 도린이었지만 밀라노 디자인 스쿨 출신 신입 디자이너의 등장은 그녀를 흔들었다. 모터사이클을 좋아하고 디자인 캐드를 잘 다루던 도린이 다년간 차곡차곡 자신의 존재감을 다져왔는데 들어온 지 2개월도 되지 않은 신참 디자이너가 급부상(신참이 들어와 제안한 디자인이 다수 매인에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최종 생산 매수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었다.)하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태리는 네덜란드와 같은 유럽 권이지만 그들에게 밀라노에 대한 동경은 생각보다 큰 부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도린은 "이태리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새내기 디자이너의 디자인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물론 새내기의 디자인이 유려하고 감각적이긴 했지만 천이든, 가죽 슈트든 절개선을 고려치 않은 디자인으로 인해 내가 디자인을 받자마자 "이 디자인을 곧이곧대로 실행하면 요척 증가로 가격이 20~30%은 상승한다."며 몇 번 메일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이때 느낀 이태리의 감각,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심지어 같은 유럽권의 사람들도 그리 생각하니, 이태리 패션이 참 궁금해졌다.
독일 바이어와 함께 회사에 방문한 20년 된 테크니컬 디자이너는 나의 패턴을 들여다보곤 "이태리 패턴 스펙을 참조했는지." 물었고, 유럽 바이어들은 이태리 명품 모터사이클복처럼 패턴을 해 달라 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핏의 이태리 고가 의복을 구매하여 캐드실에 주고 갔으니 이태리 패턴을 갖고자 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들이 주고 간 사이클복을 디지타이징 위에 올려놓고 줄자로 모든 수치를 측정한다고 궁금증이 풀릴 리 만무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나는 그 당시 천불이 넘던 의복을 면도칼로 분해했다. 분해된 패턴을 디지타이징에 입력하여 시간 날 때마다 패턴을 분석했다. 뭔가 달랐다. 그런데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해 답답했다.
이태리 패턴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궁금했다. 이태리는 어떻게 패턴 작업을 하기에 유럽인들 조차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 하나? 궁금하여 이태리에 가보고 싶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태리에 가서 패턴을 배워보리라.' 하고 말이다. 언제일지 모를 그 '기회를 만들어 보리라.' 했다.
유럽 바이어와 디자이너들이 이태리 패턴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가면 나는 수련의 생활로 가끔 들어오는 남편에게 "이태리 패턴이 너무 궁금하다." 했다. 남편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족한 잠을 잤다. 둘째 낳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부모님의 성화가 한약으로 배달되던 때 남편에게 넌지시 물었다. "애를 갖게 되면, 그리고 낳고, 나서 모유수유가 끝나고, 당신이 취직하면, 딱 일 년 이태리에 나가 공부해도 될까?"라고 물었다. 남편은 피식 웃으며 "그럼 먼저 애를 가져야지, 애가 생기고, 애를 낳고, 돌을 넘기면, 그럼 가봐, 그땐 내가 레지던트도 끝났을 때이고 취직해서 돈도 넉넉히 벌 테니 당신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해봐." 했다. 남편은 '말이 쉽지 애가 그리 쉽게 생길까?' 했고, '말이 그렇지 애를 낳고, 두 아이를 놔두고 타국에서 일 년을 공부하겠나 싶었고', 먼 후의 일이라 생각하니 남편 입에서 나오는 말은 깃털처럼 가볍게 내게 던져졌다. 문제는 남편은 '설마 정말?' 하는 마음으로 깃털처럼 말을 뱉었고 나는 '천근의 무게로 그 말을 받아 가슴에 고이 간직했다.'는 데 있다.
돌잔치 3개월 전 박사과정 시험을 봤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쥐어짜서 공부를 하며 '그래서 어른들이 공부는 젊어서 하라는가.' 했다. 시부모님은 "살살 강의나 하고 학생들 패턴만 가르치며 지내지 뭔 박사과정이냐."고 했다. 둘째 돌이 다가오며 나는 남편에게 "박사과정 1학기를 마치고 이태리 유학을 일 년만 하고 싶다." 하니 남편은 "진짜? 진짜 가려고 이태리를! 애들과 나는 어떻게 하고? 특히 둘째는 어떻게 하고?" 했다. 나는 "당신이 애 낳고 기회 봐서 가보라며? 지금이 그 기회라 생각해서 말이야. 박사 1년 차가 아니면 힘들지 않겠어?" 하니 남편은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지, 박사 1년 차 2학기에 가는 게 최상이긴 하네." 했다.
친정부모님은 내 말을 듣고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는 나를 부엌으로 불렀다. "너 이혼당하려 그러니? 애 둘을 두고 유학 간다니? 애들도 건강하게 잘 낳고, 네 남편도 이제 곧 대학병원 교수 자리에 들어가는데, 너 나가 있는 동안 맘이라도 바꾸면 어쩌려고 그러냐? 그 집에서 이제 뭐가 아쉽냐, 네가 없어도 그만인데, 왜 그러니, 애들 돌보며 하고 싶은 공부하고 강의하면 되는데." 했다. 엄마는 "두 애를 뺏기고 이혼당하기 십상."이라며 걱정이 넘쳤다. 나야 남편과 살았으니 남편을 믿지만 엄마 입장에서 남의 자식을 쉬이 믿기 어려웠을 터이니 걱정을 펼치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지만 엄마가 "이혼당한다는 말"을 그리 쉽게 해서 놀랐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애는 내가 낳아서 내 아이들이고, 세상이 바뀌고 내가 죽었다 살아나도 그건 변하지 않으니 됐고, 남편 맘이 바뀌면 그릇이 그만한 게고, 그렇게 쉽게 변할 맘이라면 지금 변하는 게 낫지, 애들 다 키우고 변하면 그게 더 골치야. 그리고 새 여자 들여 키울 작정이라면 해보라 해야지, 내 자식인 건 안 변해 엄마, 그리고 나만한 여자 어디 가서 구할 수 있으면 구해보라 해야지, 그 정도 자신감도 없이 어찌 살아. 일 년은 가서 공부하고 싶어." 했다. 엄마는 당황한 눈빛으로 "너는 정말, 내 자식이지만 모르겠다." 했다. 저녁식사 후 아버지는 남편 있는 자리에서 나를 보며 "너는 세상 무서운지 모르는구나, 허긴 출가외인이니 네 남편이 허락하면 어찌 내가 가라 마라 하겠냐? 용감은 한데 겁이 없구나, 정말." 했다. 남편은 "걱정 마세요. 장인어른, 도전을 해보겠다는데, 이젠 제가 도와줘야죠."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걱정 마세요. 아버지! 저는 남편으로부터 허락받는 존재가 아니에요. 내 인생을 누가 허락하고 말고 할게 뭐 있어요. 서로 존중하며 배려하는 거죠. 이제 제가 존중받을 때라 생각할 뿐이에요" 했다. 엄마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너도 참!" 했다.
둘째 돌잔치를 1월에 한 후 2월에 남편과 15일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비행기표며, 여행 일정이며, 숙소 예약을 모두 내가 했다. 남편은 막 전문의 시험을 마치고 대학병원 스텝 자리가 예약된 상태였다. 독일, 스위스, 프랑스를 거쳐 이태리 밀라노에 가서 미리 예약한 학원 상담을 했다. 남편은 나와 함께 학원을 둘러보고 상담자와 나누는 얘기들을 귀담아 들었다. 마랑고니는 친절했다. 그들은 솔직하게 패턴이 주목적이라면 세꼴리를 가라 했고, 세꼴리는 네가 있을 곳은 여기라 했다. 3대째 이어져 내려오며 패턴 전문학원을 운영 중인 사장 아들은 내 경력을 듣고 남성복 패턴이라면 세꼴리가 세계 최고라며 자부심에 가득 찬 학원 역사를 늘어놨다. 나는 세꼴리에서 패턴을 배우기로 결정하곤 남편에게 "앞으로 일 년 내가 있을 학원이니 눈여겨봐요." 했다. 학원 상담이 끝나고 밀라노(카스텔로 스포르체스코 성)의 미켈란젤로 미완성 론다니니 피에타상을 보고 둘 다 마음이 싱숭생숭했으니 새로운 배움과 새로운 환경에 각자 처해질 것에 대한 현실을 확인하는 자리여서 그랬던 것 같다.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며 남편은 "천안 부모님께는 내가 얘기할게, 당신이 부연설명 안 해도 되게 정리해서 말할게, 그런데 난 당신 없이 어떻게 일 년을 사나!" 했다. 두 분이 어찌 나올지 남편도 나도 예측이 어려웠다. 집에 도착하니 15일 동안 손자 재롱에 푹 빠졌던 시부모님은 잘 지내고 계셨다. 남편은 그 뒤 내가 잠시 오피스텔에 작업하러 간 동안 시부모님께 내 유학 계획을 말씀드렸고, 시어머니는 한참 구시렁거리시다 "그럼 일 년 동안은 내가 손자와 함께 자도 되겠구나!" 하셨단다.
일주일 후 시부모님이 대전에 오셔 저녁식사를 하며 "이태리로 꼭 유학을 가야겠냐? 그럼 애는 누가 보냐!" 했다. 남편이 "나랑 엄마가 봐야죠." 하니 "아니, 애는 엄마가 키워야지. 아빠가~그게 말처럼 쉽니? 너도 이제 병원 나가야 되고." 하며 시어머니는 "뭐 대단하게 배울 게 있다고, 애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했다. 남편은 "일단 일 년은 저녁 당직을 설까 하고요, 낮에는 돌봄 아주머니가 오시니까 엄마가 저녁에만 봐주세요." 했다. 시어머니는 "내가 힘도 없고 뭐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아줌마가 와서 청소며, 빨래며, 반찬이며 다하면 저녁에는 살살 볼 수 있을 것도 같기는 하네." 했다. 남편은 편치 않은 맘에 "엄마, 손자 나면 엄마가 봐준다면서요, 이제 실컷 볼 수 있잖아요." 했다. 내가 "남편이 봐야죠. 도우미 아주머니랑, 어머님은 잘 감독해주세요. 잘하나." 했다. 시어머니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를 일 년은 데리고 잘 수 있다며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다행이었다.
유학 준비를 했다. 입학원서에, 비자서류에, 비자 면접에. 이태리어 사전과 테이프가 들어있는 이태리어 책을 사서 첫 페이지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듣고, 외웠다. 비행기표를 사고, 이태리에 집을 구하고, 누구의 도움 없이 오로지 남편의 격려로 혼자 준비했고 밀라노로 혼자 출발했다.
결혼해 7년을 시부모님께 말대답 한 번 없이 살았다. 남편이 늘 "나만 믿으라고, 당신 옆에는 내가 있다며, 당신이 무얼 원하던 해주겠다."던 남편 말을 듣고 살았다. 7년을 듣고 살다 시부모님께 말했다. "어머님, 아버님, 짧지는 않지만 꼭 가서 배우고 싶어요. 두 분이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어요." 했다.
남편은 공항에서 날 떠나보내며, "건강하게 지내고, 애들 걱정은 마, 내가 알아서 잘 볼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그곳에서 일한다고 눌러앉지만 말아." 했다. 그 당시는 뭐가 그리 쑥스러웠는지 남편을 꼭 안지도 못하고 비행기를 탔다.
살면서 사람은 말에 행동으로 답해야 할 때가 있다. 말의 무게를 행동으로 지는 사람만이 진실하다. 수많은 사랑의 언어가 바람같이 시간에 날리는 이유는 그저 말 뿐이기 때문이다. 행동이 아니라. 난 참 축복받은 아내이며 며느리다. 말의 무게를 행동으로 갚는 남편을 두어서, 그런 멋진 아들을 둔 시부모님을 두어서 말이다. 그러니 이러니 저러니 해도 수년의 시월드 부등가를 한 번에 등가로 바꾼 게 아닌가? 시월드의 부등가를 단박에 등가로 바꾸는 순간을 난 절대 놓치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남편에게 "정말 어떻게 보낼 생각을 했어?" 하고 물으면 남편은 웃으며 대답하길, "두 애를 낳으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설혹 안 바뀐다 해도 애가 둘이니 돌아는 올 거라 생각했지. 내가 생각과 판단이 명료하잖아. 차라리 이혼남보다는 아내를 유학 보내는 통 큰 남편이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한다. 남편은 "내가 동의하지 않았으면, 난 이혼당했을 거야! 그렇지 않나?" 하기에, 내가 "왜 이혼을 해, 죽음을 불사하고 애 둘을 낳고, 키우고, 5년을 독박 육아하며 당신 뒷바라지를 했는데, 누구 좋으라고! 참 어이가 없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