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인, 쟤가 씀씀이가 헤퍼 걱정입니다!
딸 같은 며느리 9
2010년 1월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중국 장가계 여행상품을 골라 친정아버지께 "가시겠어요?" 물으니 1초 주저함도 없이 "간다." 하셨다. 전화를 끊고 시어머니께 연락을 하니 "일본이면 몰라도 중국은 됐다." 하셨다. 친정부모님은 여행을 좋아하셨다. 자식들이 어딜 가자하면 한 번도 싫다 하지 않으셨다. 국내던, 해외던, 유명하던, 그저 별 볼 일 없는 곳이던, 자식들이 가자하면 벌떡 길을 나섰고 어떤 음식이던 마다치 않고 즐기셨다. 아버지가 군인 시절 춘천에서 큰 딸을, 경주에서 둘째 딸을, 강원도 횡성에서 셋째 딸인 나를 낳으셨으니 젊어서부터 부모님은 싫든 좋든 돌아다니며 지내는 삶을 사셨다.
그래서 그런지 친정부모님은 여행을 좋아하셨고 언제나 자식과 함께 할 시간을 기다렸다. 사과농사를 짓던 밭에 집을 짓고, 텃밭에 푸성귀를 심고는 주말마다 자식을 기다렸다. 철마다 기다렸다. 봄이면 양지바른 산에서 자란 쑥을 캐어 정성껏 쑥떡을 만들어 기다리고, 한여름엔 얼음 동동 시원한 콩국물을 만들어 놓고 콩국수를 먹자며 기다리고, 늦여름엔 찰옥수수를 간간하게 한 솥 쪄놓고, 가을에는 감자와 고구마를 상자 가득 포장해놓고 기다렸다.
그런 부모님이니 중국 장가계를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말이 모시고지 엄마, 아버지는 딸들이 돌아가며 여행 계획을 세우면 출가외인인 "딸들에겐 일체 비용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친정부모님의 철칙에 따라 모든 경비를 냈다. 아버지는 여행 일정표에 찍혀있는 1인당 상품 가격을 두 배하여 딸들의 통장에 입금했다. 부모의 물질적 여유는 자식에겐 복이다. 친정부모님이 장가계와 원가계를 둘러보며 "옛 동양화 그림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하며 "잘 구경했다." 좋아하시니 시부모님이 맘에 걸렸다. 낚싯바늘이 마음에 걸린듯했다.
그해 여름 "일본이면 가보시겠다." 한 어머니의 말씀대로 일본 여행을 계획했다.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다테야마 산과 옛 마을을 방문하는 코스( 다테야마 쿠로베 알펜루트-쿠로베 협곡-시라가와 합장촌-료간 스이메이칸-하쿠바 도큐호텔)로 시어머니도 좋아하실 듯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인지라 며칠을 고르다 고가 상품을 선택했다. 엄마에게 시부모님을 모시고 일본 여행을 할 예정이라 하니 목소리에 부러움이 담겼다. 엄마는 "일본은 나도 안 가봐서~ 좋으시겠다. 며칠 다녀오니?" 했다. 내가 "4박 5일인데 엄마도 가실래요? 자유여행도 아니고 패키지여행상품인데, 함께 가실래요?" 여쭈니 목소리가 밝아지며 "아버지랑 상의해보마." 하셨고, 그날 저녁 엄마는 "네 아버지가 일본은 꼭 가보고 싶다신다. 우리도 간다." 했다. 내가 "조금 비싼 상품이야 엄마. 호텔도 좋고, 쇼핑도 없고, 음식도 좋아서." 했더니, 엄마는 "죽으면 돈 들고 가니? 걱정 마라." 하셨지만 친정부모님에겐 죄송한 맘이 들었다.
시부모님과 일본 여행을 가자했더니 남편은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잔고를 체크했다. 그러고는 일인당 소요경비가 얼마냐 물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고 어머니의 까다로운 성향을 고려해 고가 상품을 골랐어." 하니, 남편은 "너무 비싸네~" 하면서도 "당신이 그리 선택했다면 그게 좋을 듯하네." 했다. 시부모님의 여행경비에 우리 4인의 여행경비를 합치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래도 금액이 중요한가? 우리 가족을 위해 고생하고 애쓰신 세월이 있고 함께 좋은 것을 보며 느끼는 행복은 돈으로 환원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총 8인이 함께 다녔다.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가, 시어머니와 친정엄마가 버스에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여행을 했다. 우리 8명의 가족에 부부동반 4쌍(50대 후반 친구 모임)이 함께 하여 총인원은 16명이었고 모두 즐거웠다. 호텔에 비치된 육가다를 입고 정통 일본식 식사를 하고, 아침, 저녁마다 온천욕을 했다. 부부동반으로 오신 아주머니들은 내가 누구의 딸인지 헷갈려하셨고 여행이 끝날 즈음에야 시어머니와 친정엄마가 누군지 알겠다 하셨다. 재미있었고 좋았다. 일제시대를 겪은 아버지와 시아버지는 일본 문화, 일본 음식, 일본 건물을 유심히 보고, 식사 때는 반주를 하며 과거 아픈 역사와 힘든 직장생활 얘기를 나누셨다. 엄마와 시어머니는 자식들 키우며 고생스러웠던 옛 시절을 마음껏 펼쳐놨다.
4박 5일의 여행이 끝나갈 즈음 시어머님이 다가와 말씀하셨다. "참 좋다. 네 덕에 좋은 것 구경하는구나." 내가 "어머님이 좋으시다니 저도 좋아요. 저도 이곳은 처음인데 참 좋네요. 산도, 호텔도, 먹거리도요."하고 대답하니 시어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말이다. 여행경비가 꽤 나가지 않니?" "그렇죠. 그래도 어머니, 저희는 둘이 버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했다. "아니 친정부모님은 어떻게 했니?" 하셨다. 난 속으로 '아 그게 궁금하셨구나.' 싶어 활짝 웃으며 "어머니! 엄마, 아버지는 이미 제게 송금했어요. 언제나처럼요." 했다. 시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그러셨구나, 그래야지. 너희가 무슨 큰돈이 있다고." 하고는 친정엄마 옆으로 가서 활짝 웃으며 말씀을 나누었다.
여행을 마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이 주일 후 친정 가족모임이 있어 친정에 가니 엄마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네 시어머니가 걱정이 많더라. 네 씀씀이가 헤프다고 말이다." 나는 "무슨 말이야 엄마?"하고 물었다. 엄마는 우물거리며 "아니 네 시어머니가 여행 중에 내게 그러더구나. 사분인, 쟤가 씀씀이가 헤퍼 걱정입니다! 하길래. 그래서 혹 우리 경비를 네가 낸 줄 알까 봐, 혹 오해가 있을까 봐서 말이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엄마, 걱정 마~. 무슨 말인지. 뭐가 헤픈지. 엄마, 아빠 경비는 다 받았다고 말씀드렸는데, 뭘 헤퍼! 엄마, 아빠 것도 우리가 내야 되는데 그게 난 맘에 더 걸렸는데!" 했다. 엄마는 시부모님이 친정부모의 경비를 내가 낸 줄 알고 혹 무슨 오해가 없는지 내게 확인하는 것이었고, 나는 시어머니가 내게 조심스럽게 와서 묻던 대화가 생각났다. 마음이 상했다.
남편에게 화를 냈다. 남편이 한 말도 아닌데 화가 나고 친정부모께 죄송했다. "아니 어머님은 여행 중에 내 흉을 그리 보시면 친정부모가 어찌 생각할까 생각이 미치지 않나 보네. 그리고 예전에도 친정부모님이랑 여행 가면 친정부모님이 경비를 다 내셨다 말씀드렸는데. 왜 갑자기 내가 씀씀이가 헤프다고 했대? 이해할 수가 없네. 그게 사돈 앞에서 할 말인지." 남편은 얼굴이 굳어지며 "그러게 무슨 말인지 나도 몰라." 했다. "아니 내가 어머님, 아버님께 여행경비를 달란 것도 아니고, 내가 바보란 생각이 들었어. 친정부모님 경비도 내가 냈어야 되는데. 참 내가 바보야. 딸 키워야 소용없다는 말을 이래서 하는가 보네." 했다. 남편은 "당신이 이해해. 엄마가 왜 그랬는지 나도 몰라. 그냥 당신이 넓은 맘으로 이해해." 했다. "난 맘 안 넓어. 아주 좁아. 엄청 좁아." 그때는 정말 화가 났다.
결혼한 후 이런 일들이 생기면 집합 그림이 떠오른다. 동그라미 두 개가 겹쳐있거나 떨어져 있거나 포함되어 있거나 한 집합 그림 말이다. 시부모님은 당신 자녀와 손자들과 내가 함께 있을 때, 나를 늘 원 밖에 있는 듯 말씀하시다가도, 친정부모 앞에선 나를 당신들의 테두리에 집어넣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편의성으로 내 존재를 당기고 밀고 붙이고 떼고 한다. 경제공동체를 강조할 때는 언제나 붙이고, 일을 하고 손이 필요한 시점에서는 떼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말이다. 여행을 다녀오고 마이너스 통장을 한참 동안 메꾸었다. 그래도 그 여행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음 해인 2011년 여름, 헤퍼서 큰일인 내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9박 10일 터키 여행을 갔다. 여행을 계획하며 남편에게 말했다. "이번 참에 내 돈으로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갈라 했는데, 어찌하나~ 친정부모님은 둘째 언니랑 터키를 다녀와서, 당신~ 돈 번 줄 알아. 둘째 언니가 부지런해서." 했다. 남편이 밝게 웃었다. "이왕 씀씀이가 헤프다는 말을 들었는데 좀 더 헤프게 살아야지, 그래도 같이 여행 가면 좋아하시니 그 헤프다는 말이 이번 여행으로 거둬지려나 모르겠네." 했다. 남편은 "당신이 뭐가 헤퍼, 부모 모시고 다니며 그런 말 듣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야. 미안해, 내가 잘할게." 했다.
2014년 1월 캄보디아 여행을 계획했다. 시아버지는 이미 다녀오셔 시어머니만 가시기로 했고 친정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엄마는 전화를 받고는 우물쭈물 말을 삼켰다. 잠시 내려진 전화기 속으로 아버지께 묻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 셋째 딸이 캄보디아 가자는데? 가시려오?" 하니 아버지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시부모님만 모시고 다녀오라 해. 난 개들 미국 있을 때 미국 구경이나 가게." 했다. 엄마는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이번에는 안 간단다. 너 미국 나가면 미국이나 가시겠다고." 했다. 내가 "엄마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도 정말 좋아, 함께 가요. 미국은 미국이고, 싫어?" 하니 엄마는 "그냥 시어머니만 모시고 다녀와라. 우린 담에 갈게." 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맘이 슬펐다. 아버지는 내가 들었던 그 의미 없는 소리를 맘에 걸려 했다.
슬프게도 아버지는 내가 미국 연수를 나간 3개월 후 폐암 선고를 받고 3개월 병원에 계시다 2015년 2월에 돌아가셨다. 미국 구경을 하지도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엄마는 지금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네 아버지가 미국 간다고 여행경비 통장에 3천만 원을 모아뒀었다. 미국 가서 풍족하게 쓴다고. 내가 뭐 좀 사겠다 돈 좀 달래도 모른 척하면서 말이다." 했다. 요즘도 엄마는 "아버지가 셋째 딸이 미국에 있으니 가 봐야지, 드넓은 미국 구경도 해야지 했는데, 그리 허망하게 갔다."며 눈물을 닦는다. 나는 아버지가 소소하게 받던 사글세와 예금이자를 차곡차곡 모아 미국에서 크게 쓰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딸이 듣던 "쟤가 씀씀이가 헤퍼서 큰일"이라던 그 듣기 싫던 소리를, 아버지는 미국에서 당신이 모은 돈으로 뒷말 없이 쓰게 하려 그리 돈을 모았던 사실을 말이다.
다 지나간 말이고 일이다. 뭐라 해도 양가 어른을 모시고 간 일본 여행은 즐거운 추억, 행복한 시간이었다. 엄마, 아버지와 시어머니, 시아버지,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만년설을 보고, 야외 온천을 하고, 시라가와 합창촌의 찌는듯한 한 낮 더위에 친정아버지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들고 8명이 뚝뚝 아이스크림을 손에 흘리며 먹던 그 모든 추억은 사진처럼 내 가슴속에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일본 여행 속 만년설을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은 말하고 있다. 우리 부모님들은 미소 속에 행복하고, 그들로 연유한 내 두 아이들은 귀엽고 어리고, 그들의 사랑하는 자식인 우리 부부는 젊고 사랑스러우니 우리 가족 모두가 만년설처럼 든든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것을 말이다.
사진 속 우리는 누가 누구의 아들, 누가 누구의 딸이 아닌 사랑으로 연결된 한 덩어리의 사랑스럽고 행복한 가족임을 말이다. 말이 많던, 탈이 나던,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온 여행은 그래서 좋다. 그분들과 우리들의 시간을 알기에, 그분들의 늙음과 아이들의 성장을 알기에, 함께 할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참 좋다.